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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별 Feb 25. 2023

장례식 1일 차(2)

10년 만에 만난 친구가 문상객으로 찾아왔다. 

PS : 올해 들어서 벌써 가깝지 않은 3명의 주변인이 저세상으로 갔다. 그것도 내 또래들.

남은 유족들도 내 경험과 같은 일을 겪었겠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아무튼, 먹고사는 데 신경 쓰느라, 애써 시작한 글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조금씩 시간을 내서 남겨 둬야겠다.  





상조회사에서 제공하는 구급차가 도착했다. 

운전자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주며 확인시킨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함께 오열했다. 


차를 가져온 오빠는 자기 차로, 엄마와 나는 앰뷸런스를 타고 고대구로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길도 안 막혀서 10여분 만에 도착. 

앰뷸런스 기사가 8만 원이 적힌 영수증을 내민다. 먼저 계좌이체 해주고, 상조팀장이 오면 그때 정산받으라고 말하면서. 

병원 내 장례팀은 먼저 아버지 시신을 '수시'하기 위해 안치실로 모셨다. 

살아생전, 내 몸이 뻣뻣해지기 전에...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수시 : 시신을 바르게 한다는 뜻. 시신이 굳어지기 전, 수족을 골고루 주물러 굽힘이 없이 바르게 펴고 묶어 주는 절차를 말한다. 환자가 무릎이나 다른 부위가 굽어진 상태로 운명하였을 경우 수의를 입히거나 입관시킬 때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임종 후 바로 반듯이 해 주어야 한다.


그다음 정갈한 옷(수시복, 수세복)으로 갈아입힌다. 보통 장례식장에서는 따로 수시복을 갖고 있는 듯하다.


수시의 마지막 과정인 듯한 구강 소독, 즉 입 안을 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독한다. 숨이 끊어진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두고 너무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후, 두 팔과 손을 바르게 펴서 배 위에 공수한 모양으로 올려놓은 다음 끈을 이용하여 동여맨다. 동여맬 때는 양끝을 합쳐서 매듭을 짓지 않고 끈을 몇 번 비틀어서 한쪽으로 끼워 놓는다. 끈을 풀 때 잡아당기기만 하여도 풀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양 어깨, 팔꿈치, 무릎과 정강이 부위를 동여맨다.


발목을 정상으로 굽혀서 고정시켜 동여매고 지금까지 맨 방향과 직각으로 하여 손의 끈과 연결하여 준다. 두 손의 엄지가락과 두 발의 엄지가락을 묶어 수족의 끈을 마주 잡아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시신을 수세포(홑이불)로 덮은 후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목을 받친 후, 안치실에 모신다. 아버지가 계신 곳은 1번 안치실이었다. 



수시와 안치까지 마친 뒤, 사무실로 갔다. 그리고 빈소 평수를 고른 후, 제단 장식 등을 논한 뒤 바로 상조팀장이 들어와서 화장 시설 예약을 진행했다. 비는 시간이 별로 없다. 서울 시민은 서울시설공단에서 운영하는 양재서울시민공원과 벽재 화장터를 사용할 수 있다. 화장 비용은 12만 원가량. 우리가 발인하는 날에 서울은 오후 3시, 벽재는 오전 7시 두 타임 남았는데, 우리는 양재에서 3시에 하는 것으로 정했다. 


2박 3일을 사용할 빈소로 갔다. 사실, 이 과정은 정신이 없는 터라 기억나는 게 없다. 상조팀장과 병원 장례식장 팀이 와서 도운 것까지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빈소에 도착해서 좀 있다가 식당과 매점 관계자가 올라온다. 식당 메뉴는 국, 밥, 반찬, 술안주, 등등 고르도록 되었다. 정말 다양했다...! 

장례식장에 가면 육개장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고를 수 있는 국 종류가 많았다. 단, 육개장이 제일 저렴하기 때문에 우리도 육개장을 택했다. 


밥은 흰밥, 그리고 반찬 가짓수까지 정해야 한다. 슬슬 피곤해졌다. 나머지 부분은 오빠가 정리해서 김치, 샐러드, 꽈리고추 멸치볶음, 수육, 방울토마토 이렇게 정리했다. 참고로, 반찬과 국, 밥 등 음식은 모두 30인분씩 주문하는 게 시작이다. 정말 비효율적이고, 제일 화가 나는 그들의 법칙이었다. 그 누가 장례식장에 얼마큼 사람이 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는 30인분의 밥과 국을 남겼고, 발인을 위해 나섰다. 

음식을 재사용할 수 없고.. 어차피 다 버릴 음식인데, 왜 30인분부터 주문해야 하는지, 다분히 장삿속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부분은 꼭 고쳤으면 좋겠다. 


아무튼 우리는 도착한 상복으로 갈아입고, 빈소에 가서 장례식 시작을 위한 인사를 올린다. 빈소가 좀 초라해 보였다. 이때, 꽃집에서 사람들이 올라왔다. 사진틀이라도 하시라고. 국화꽃으로 장식한 사진틀이라도 끼워놓으니 조금 낫다. 우리는 불교식 장례를 치를 예정이라서 20만 원인 초제상도 올렸다. 


근조화환들이 도착하기 시작하고, 배송 기사들은 사인 받고 사진을 찍어 갔다. 마침 휴일이었고, 문상객이 없을 것 같아서 안내데스크에 앉아 상대편 빈소를 쳐다보았다. 참고로, 구로고대병원 빈소 40평대는 유일하게 2개가 마련되었으며 빈소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쪽은 상주들이 많았다. 우리는 3명. 부러움이 앞섰다. 그쪽은 장례 2일 차였고, 기독교였는지 오후 2시경 목사와 여러 신도들이 와서 추도식을 진행했다.  


오후 3시쯤 되자, 우리 빈소에 시다림을 위해 절에서 스님 세 분이 오셨다.  세분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

방석과 작은 상을 마련해 드리고, 주 기도를 맡으신 진광스님께서 종을 흔들면서 염불을 해주신다. 

두 분 중 한 분은 목탁을 친다. 깊고 울림이 있는 진광스님의 목소리, 기도 중 아버지 성함 뒤에 '영가'라는 명칭이 붙는 것을 보니 정말로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것이 실감 난다. 기도는 30분 정도 후 끝났고, 내일 3시 입관식에 맞춰 다시 오시겠노라고 말씀하신 후 스님들은 가셨다. 



시다림은 망자를 위한 염불식 내지는 상례전반에 대한 불교 특유의 행법으로, 망자가 집착의 마음을 버리고 피안을 향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장송례葬送禮 중 하나이다.



저녁, 문상객들이 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오빠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10년 만에 본 초등학교부터 동창인 친구가 데스크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고 한참 머뭇거린다. 서로 본지 너무 오래돼서 그랬다. 알아보는 3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뒤에 계시던 어머니도 따라 울었고,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든 말든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저녁 9시 50분이 되자, 식당 도우미 중 한 명이 나를 부른다. '인수인계'라는 작업을 해야 한다며. 그리고 남은 음식과 자신들이 퇴근 후 올 문상객을 대비해 차려둔 상차림, 내일이면 바뀌는 도우미들에게 알려줄 것들을 설명한 후, 밤 10시에 갔다. 문상객은 새벽 1~2시까지 있었다. 황금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현충일, 오전 8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정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정신없는 장례 1일 차를 마쳤다. 


장례 2일 차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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