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까마귀의 나무>

: 무한을 열망하는 존재

by 권연희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까마귀의 나무>, 1822년경, 캔버스에 유채, 59 x 73cm, 루브르 미술관, 파리


언덕 전경에 잎을 거의 떨군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다채로운 노을빛 하늘을 다 뒤덮을 정도로 굽이굽이 복잡하게 가지를 뻗어낸 나무는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주변에는 그루터기와 부서진 나무 몸통이 나뒹군다. 여기저기에 낀 이끼는 나무가 살아온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까마귀 몇 마리가 나무 주변을 맴돌고, 하늘에서도 까마귀들이 줄지어 날아온다. 저 멀리 햇살의 세례를 받은 바다와 백악 절벽이 희미하게 보인다.


화가는 한참 이전의 드로잉(1809)을 기반으로 작업했는데, 극적인 굴곡으로 가지를 늘리고 잔가지를 더해 다른 나무로 변신시켰다. 캔버스 뒤의 명문에 따르면 이 언덕엔 고인돌이 있고, 까마귀와 주변의 나무들은 죽음과 쇠락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처럼 하늘을 향해 뻗은 수많은 가지들은 나무의 강렬한 존재감과 하늘을 향한 의지를 보여준다. 까마귀들에게 이리 와 쉬라고 말하는 듯하다. 미술의 역사에서 풍경의 일부이자 이야기의 배경에 불과했던 나무가 드디어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영국의 존 컨스터블(1776~1837)과 동시대를 살았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발트해 연안의 항구 도시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양초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엄격한 루터파 집안에서 성장한 소년은 성인이 되기 전에 가족의 죽음을 여러 번 경험했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이후 두 누이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세 살 때는 빙판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자신을 동생이 구하고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다. 트라우마로 남은 이 사건으로 프리드리히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고, 인간의 운명과 신의 섭리를 질문하게 되었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자화상>, 1810년, 종이에 검정 초크, 22.9 x 18.2cm, 베를린 판화 박물관

프리드리히는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와 코펜하겐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1798년 독일의 피렌체로 불린 드레스덴에 정착한다. 타지에서 방황하던 화가는 자연과 신앙에서 기댈 곳을 발견했다. 괴테(1749~1832)의 소설 속 베르테르처럼 북구의 자연에 매료된 프리드리히는 고향 근처에 백악절벽으로 유명한 뤼겐 섬으로 자주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이 섬에서의 해변 설교로 유명한 루드비히 코제가르텐(Ludwig Gotthard Kosegarten, 1758~1818)은 화가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시인이자 목사인 코제가르텐에게 자연은 ‘그리스도의 말씀’과도 같았다. 이에 공감한 프리드리히는 자연에 깃은 신성을, 헤아리기 어려운 신의 섭리를 담아내고자 했다.


상당 기간 드로잉과 수채, 판화 소품만 작업하던 프리드리히는 서른 살 즈음(1803)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음 해엔 자신이 매장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의 장례식>을 그렸다. 이후의 자화상에서 눈에 띄는 구레나룻은 목을 그은 상처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자의 갈퀴 같은 수염과 꿰뚫어 보는 눈의 화가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이다. 1805년 서른의 프리드리히는 괴테가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세피아(흙갈색 안료) 드로잉으로 최고상을 받으며 차차 알려지기 시작한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산중의 십자가>, 1807년, 캔버스에 유채, 115 x 110.5cm, 드레스덴 미술관

본격적으로 유화를 시도하며 프리드리히가 그린 첫 작품 <산속의 십자가>는 기존의 제단화와 다르게 풍경이 주인공이다. 전나무가 솟아 오른 돌산 꼭대기에 십자가상이 서있지만, 정면도 아니고 뒤쪽 가에서 본 모습이다. 당시 북구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십자가상은 프리드리히 풍경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구름이 겹겹이 뒤덮인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었고, 멀리서 다섯 줄기의 광선이 조명처럼 퍼져나간다.


프리드리히는 어두운 작업실에 이 그림을 전시하고 지인들을 초대했는데,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풍경을 깊이 묵상하며 감동한 이도 있었고, 풍경화를 제단화로 제시한 것에 격분한 비평가도 있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풍경의 상징은 쉽게 전해졌을 것이다. 바위 위에 세워진 십자가는 확고한 믿음을, 주변에 하늘로 곧게 뻗은 상록수 전나무는 구세주에 대한 인간의 변함없는 믿음과 영생을 의미한다. 어두운 전경과 밝은 빛을 머금은 원경의 대조는 그의 풍경화에서 특징적인 문법이다. 보는 이는 어둠 속에 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저 빛의 세계, 영원한 세계와 연결된다.


프리드리히는 스케치 여행을 다니며 자연을 세밀하게 연구하면서, 그림은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작업실에서 그렸다. 절친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1785~1847)이 그린 <작업실의 프리드리히>(1810)을 보면, 그의 작업실은 검소한 수도자의 방에 가깝다. 몇 개의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깔끔한 방은 창문도 일부만 제외하고 가려져 있다. 자연에 대한 고유한 경험과 감정을 그려내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자기 내면을 바라보았고, 그 비전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다.


“예술가의 임무는 공기, 물, 나무, 바위를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과 감각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의 임무는 자연의 정신을 인식하고, 온 마음과 의지를 다해 그 정신에 흠뻑 빠져들어 흡수한 후 그림이라는 형태로 다시 표현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1830년경)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자>와 <참나무숲 속의 수도원>, 1809-10년, 캔버스에 유채, 110 x 171.5cm, 구 국립 미술관, 베를린


프리드리히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화로 유명해졌다. <바닷가의 수도자>에는 광활한 암흑의 바다 앞에 홀로 선 수도자가 보인다. 마치 추상화와 같은 풍경 앞에서 눈은 둘 곳 없이 방랑한다. 몇 마리의 갈매기와 찰싹 거리는 파도 소리만 들릴뿐. 광대한 것 앞에서 먼지 같이 느껴지는 존재의 절대 고독과 무력함, 경외감이 전해진다. 쌍으로 제작된 <참나무숲 속의 수도원>은 폐허가 된 수도원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을 담았다. 어둠에 잠긴 하단에는 여기저기 무덤의 흔적이 보이고, 상단을 비춘 노을빛으로 수도원의 잔해와 헐벗은 참나무 가지들이 드러난다. 무한한 대자연 앞에 짧고도 짧은 우리네 삶을 느끼게 된다.


두 그림은 전통적인 풍경화와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구성과 묘사를 보여준다. 특히 극소의 인물을 통해 자연의 광대함이 강조되었다. 이처럼 프리드리히는 눈앞에 풍경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육신의 눈을 감고, 정신의 눈으로 그림을 보라”는 충고처럼, 그는 자신의 감정과 영성을 표현하는 풍경을 창조했다. 그 풍경은 보는 이를 끌어들여 자연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사색하고 각자의 감정에 젖어들게 한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은 문학과 철학에서 시작된 낭만주의라는 거대한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한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자들은 감정과 믿음, 정신성을 우위에 두었다. 무엇보다 이전에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었던 자연을 찬미했고, 그 안에 깃든 신성과 정신성에 주목했다.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괴테는 고대의 고전문화에서 눈을 돌려 중세 가톨릭에서 독일의 정체성을 찾았다. 울창한 북유럽의 침엽수림을 닮은 고딕 성당은 신을 향한 직관과 감정의 산물이었고, 둘은 과거 독일의 영광과 힘을 상징하게 되었다.


“세속적인 것에 고결한 의미를, 일상에 신비스러운 외양을,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진기한 특징을, 유한에 무한의 외관을 부여함으로써 나는 그것을 낭만적으로 만든다.” -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겨울 풍경>과 <교회가 있는 겨울 풍경>, 1811년, 캔버스에 유채, 32.5 x 45cm, 33 x 46cm


역시 쌍으로 제작된 1811년의 겨울 풍경화를 살펴보자. 왼쪽에는 검은 하늘 아래 쓰러져가는 고목과 그루터기 무리가 있다. 황량한 설원 중앙에는 목발에 기댄 사람이 보인다. 반면 오른쪽 그림에는 푸른 전나무와 십자가상이 꼿꼿이 서 있다. 그 앞에 한 남자가 바위에 기대어 기도하고 있는데, 전경엔 그가 던져놓은 목발이 보인다. 저 멀리 안개 넘어 고딕 성당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쓸쓸함과 절망이 느껴지는 왼쪽의 풍경은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인생의 겨울 단계를 암시한다. 반면 전나무와 함께 십자가상과 고딕 성당이 있는 오른쪽의 풍경은 그리스도 믿음을 통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한다. 십자가상을 둘러싼 상록수 전나무는 십자가상이나 성당과 자주 함께 등장하며 구원과 영생의 의미를 전한다. 새벽의 분홍빛 햇살과 설원 여기저기에 고개를 내민 새싹도 회복과 재생의 분위기를 더한다. 흥미롭게도 겨울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풍경의 배경이 되었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숲 속의 추격병>, 1813-4년, 캔버스에 유채, 65.7 x 46.7cm, 개인소장


<숲 속의 추격병> 수년간의 프랑스 점령 이후 드레스덴 해방(1814)을 기념하여 열린 애국 미술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이다. 빼곡히 들어찬 키 큰 전나무숲은 헨젤과 그레텔의 배경이기도 한 독일의 검은숲을 연상시킨다. 잔뜩 흐린 하늘 아래 총을 든 병사가 숲 속으로 걸어가고, 전경 그루터기에는 까마귀가 앉아 있다. 당시 전시도록에서 이 그림은 길을 잃은 추격병이 까마귀가 부르는 장송곡을 따라 죽음을 향해 간다고 시적으로 풀이되었다. 나폴레옹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길 잃은 프랑스 병사는 살길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그의 운명은 어두운 숲 속을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빼곡히 열 지어 선 전나무는 독일의 애국자들로, 전경의 어린 소나무는 전후세대로 해석되며 나무는 민족을 의미하기도 했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뤼겐의 백악 절벽>, 1818년, 캔버스에 유채, 90.5 x 71cm, 오스카 라인하르트 재단, 빈터 투어

1816년 프리드리히는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어 급료를 받게 된다. 2년 후 사십 대의 화가는 결혼으로 정서적인 안정도 얻는다. 그 해 프리드리히의 가장 유명한 작품 낭만주의의 교과서라 불리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뤼겐의 백악 절벽>이 탄생한다.


<뤼겐의 백악 절벽>은 스케치 여행으로 자주 들렸던 뤼겐 섬에서의 신혼여행을 기념해 그린 것이다. V자 모양의 눈부신 백악 절벽과 양옆의 흐드러진 나무 사이의 바다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노랑과 하늘, 분홍과 보라까지 겹겹이 펼쳐진 바다에 아주 작은 배 두척이 보인다. 왼쪽에는 빨간 원피스 차림의 부인이 무언가를 가리킨다. 그쪽엔 한 남자가 땅에 엎드려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다. 그 옆에 나무에 기대 선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응시한다. 이 그림에 대한 무수히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두 남자는 관찰하고 관조하는 화가의 두 자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프리드리히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까. 아슬아슬하면서도 아름다운 절벽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의 두 배는 새로운 인생 여정을 시작하는 그의 설렘과 두려움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들을 감싸는 너도밤나무 가지들이 서로 얽히고설켜있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아침 햇빛 속의 마을 풍경(외톨이 나무)>, 1822년, 캔버스에 유채, 55 x 71cm, 구 국립미술관, 베를린


<아침 햇빛 속의 마을 풍경>은 밝고 평화로운 초원을 보여준다. <외톨이 나무>로도 불리는 이 그림의 주인공은 중앙에 홀로 우뚝 선 참나무다. 거대한 나무는 폭풍우나 전쟁 같은 풍파로 여기저기가 부러져있다. 자세히 보면 나무 둥치에는 양치기가 기대어 쉬고, 그 뒤로 양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앞쪽엔 작은 못이 있어 자연스럽게 시편의 구절이 떠오른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시 23, 1-2) 이런 종교적 상징 때문에 나무 몸통에서 십자가 형상을 읽어내기도 한다. (확대해서 보면) 중경과 원경에는 나무와 마을이, 오른쪽 멀리에는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그 뒤로 겹겹의 산들이 초원을 감싸고 있다.


이 작품은 쌍으로 제작된 <바닷가의 월출>과 함께 아침과 저녁, 즉 하루의 주기를 담고 있다. 영원히 반복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켜켜이 구축된 공간 속에 자리한 참나무는 긴 세월의 성장과 쇠퇴의 삶을 보여준다. 외로운 고목은 땅에 뿌리내리고 하늘을 바라며 홀로 견뎌야 하는 인간 운명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맡기고, 구름과 바위와 합일되어야 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 프리드리히(1821)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드레스덴 근처 언덕과 쟁기질한 들판>, 1824년경, 캔버스에 유채, 22.2 x 30.5cm, 함부르크 미술관


드레스덴 근교 풍경에서도 주인공은 언덕 위의 나무들이다. 해가 떠오르며 노랗게 물든 하늘로 인해 나무 가지와 막 돋아난 잎이 돋보인다. 초록 잔디로 뒤덮인 언덕과 전경에 쟁기질한 갈색흑도 화면에 생기를 더한다. 멀리서 까마귀들이 먹이를 찾아 날아든다. 이 풍경화는 정치적인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1814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물러가고 이어 빈회의에서 추대된 메테르니히는 반진보적인 복고 정치로 검열과 감시를 강화했다. 드레스덴의 낭만주의 운동은 점차 힘을 잃어갔고, 프리드리히는 자기만의 세계로 물러났다. 그림에서 노란 하늘과 다르게 도시가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까마귀가 봄밭의 씨앗을 낚아채는 것은 드레스덴의 정치적인 환경이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1824년 드레스덴 아카데미 풍경화 교수직이 공석이 되었을 때, 프리드리히는 정치적인 이유로 갈망하던 자리를 얻지 못하고 부교수에 머문다. 곧 건강이 악화되고 요양에 들어가면서 점차 재정적으로 힘들어진다. 암울한 이 시기에 화가는 무덤과 묘지를 자주 그렸고, 그의 나무 그림들도 무상함과 죽음의 분위기가 짙어진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눈속의 가문비 나무>와 <눈 속의 덤블>, 1827-8년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구름이 떠다니는 산 꼭대기>, 1835년경, 캔버스에 유채, 25 x 30.6cm, 킴벨 미술관, 텍사스


1830년대 대중의 취향은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풍경화에서 멀어졌다.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던 노령의 프리드리히는 점점 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며 간간히 작업을 이어갔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1835년에는 팔다리가 부분적으로 마비되기도 했다. 그 해에 그린 산악의 모습은 이제 단순한 풍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곳곳에서 자라는 전나무들 앞에 완전히 꺾여 쓰러진 고목은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화가의 모습일 것이다. 원경에 구름 사이로 보이는 산은 하늘에 닿을듯하다. 성벽 같이 치솟은 산은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화가가 도달하고 싶은 구원의 세계를 암시한다. 말년에 프리드리히는 자연과 인생의 주기를 표현한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낭만적인 풍경화는 유행에서 멀어지며 잊혀갔고, 몇 년 후 그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프리드리히는 자연을 통해 인간의 조건은 물론 자연과 인간, 더 나아가 인간과 신의 관계를 묵상하고 표현했다. 당시 ‘고급 벽지’로 여겨졌던 풍경화는 그를 통해 감정과 신앙, 기도까지 표현하게 되었다. 자연에 눈을 돌린 낭만주의 시대에 누구보다 나무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무대에 세운 화가는 프리드리히였다. 그의 나무는 세월의 풍파와 고독한 운명을 전하는 비극의 주인공에 가깝다. 그것은 영원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 속에서 성장하고 쇠퇴한다. 무한을 향한 나무의 열망은 신을 향한 화가의 열망이자 예배이기도 했다. 미지와 무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먼지 같은 자아를 인식하며 겸허해지고 신을 갈망하는 마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