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 진동하는 내면의 풍경
연이어 내린 눈은 연말을 특별하게 만들면서 뭉크가 자주 그린 겨울 풍경화를 떠올리게 했다. 뭉크는 불안과 절규의 인물화로 유명하지만, 그가 남긴 절반 이상의 작품은 북구의 자연과 나무를 그린 풍경화다. 불행한 가정환경과 잇따른 사랑의 실패는 그를 인간 실존의 어두운 면을 향하게 했다. 알코올 중독과 정신 쇠약으로 40대에 몸과 정신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뭉크는 자연 치유와 금욕 생활로 건강을 회복하며 80대까지 왕성하게 작업했다. 방랑 생활을 접고 시골에 은둔한 인생 후반기에 탄생한 뭉크의 생기 넘치는 풍경화가 최근 전시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긴 생애 뭉크의 변화하는 내면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결로 이야기한 자연과 나무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
눈 내린 겨울밤 풍경은 한기로 가득하다. 전면에는 파수꾼처럼 우뚝 선 소나무 몇 그루가, 중경에는 톱니 같은 가문비나무 숲 사이로 작은 집이 보인다. 그 뒤 바다와 멀리 보이는 언덕으로 형성된 만은 이곳이 뭉크의 나라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임을 짐작하게 한다. 노르웨이의 겨울은 해가 금방 저물지만, 자주 내리는 하얀 눈은 파란 밤 풍경에 밝기와 반짝임을 더한다. 몽글몽글한 소나무와 뾰족뾰족한 가문비나무는 추위에도 끄떡없는 나무의 생명력을 전한다. 달빛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와 얼어붙은 바닷물,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은 일렁이고 진동하며 겨울밤의 고요와 신비를 전한다.
노르웨이 뢰텐에서 태어난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가족의 질병과 광기, 죽음으로 얼룩진 불행한 유소년기를 보냈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9년 뒤 목격한 누이의 죽음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모가 엄마처럼 돌봐주었지만, 군의관 아버지는 점점 광적인 신앙으로 다섯 아이를 훈육했다. 정신병에 걸린 여동생은 평생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허약한 체질에 이런저런 병을 앓았던 뭉크는 학창 시절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초기작은 실내를 배경으로 주로 그가 경험한 죽음과 공포를 담고 있다.
“내 예술은 실제로 질병에 대한 성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내게 공포와 고통이 없었다면 방향키 없는 삶과 같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공과대학에 들어간 뭉크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학업을 중단하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의 미술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뭉크는 보헤미안 지식인들과 자주 교류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과 관습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삶을 추구했던 이들의 태도는 그의 삶과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장학금으로 가게 된 파리에서 뭉크는 세기말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접하며 감각을 일깨웠다. 인상파의 밝은 색채와 점묘파의 기법과 함께, 특히 고흐의 휘몰아치는 붓질과 고갱의 상징적인 언어는 뭉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파리 시절에 그린 <달빛의 사이프러스>는 이 나무를 자주 다룬 고흐의 영향을 보여준다. 정신 발작으로 요양원에 머물렀을 때 고흐는 기회가 되면 야외로 나가 사이프러스를 그렸다. 하늘과 구름, 주변의 풀과 함께 요동치며 솟구쳐 오르는 이 나무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화가의 고뇌와 열정을 드러낸다. 반면 뭉크는 저녁에 실내에서 바라본 도시의 사이프러스를 주인공 삼았다. 창틀에 놓인 화분 너머 맞은편 건물의 창들에선 따듯한 빛이 새어 나온다. 그 앞에 길쭉한 몸의 사이프러스는 홀로 서 있어 왠지 고독해 보인다. 힘을 뺀 붓질로 파랗게 물든 화면은 창가에 선 화가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전한다.
1889년 애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뭉크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파리 근교 생클루에 머물며 고뇌하던 이때, 뭉크는 인상파 그림 속 여가나 유흥을 즐기는 인간이 아닌 "숨 쉬고, 느끼고, 고통받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인간을" 그리겠다고 다짐한다. 몇 해 전부터 이어온 자유분방한 유부녀 밀리 타우로브와의 관계는 엄청난 욕망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며 결국 파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 잠 못 이루었던 뭉크는 이러한 파란 색조의 밤풍경을 여럿 남겼다.
청년 시절 뭉크는 고통의 진원지인 집과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주로 베를린에서 지내면서 예술가들과 교류했는데, 여기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가인 다그니 유엘과 사랑에 빠졌으나 배신당해 그녀는 결국 <마돈나>(1894)와 <질투>(1895) 등에서 요부로 남았다. 1892년 베를린 전시에서 뭉크의 거칠고 음울한 그림들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스캔들로 뭉크는 오히려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명성을 얻게 된다.
이어 <절규>와 <불안>, <우울> 등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탄생한다. 유명한 <절규>는 친구들과의 산책에서 자연을 관통하는 비명을 느낀 화가의 경험을 담아낸 것이다. 급격한 원근법으로 멀어지는 다리 위에서 한 인물이 홀로 공포에 떨고 있다. 굽이치는 피요르드와 핏빛 하늘에서 들리는 찢어질 듯한 절규에 해골 같은 인물은 귀를 막고 있다. 주변 환경은 이렇듯 등장인물(화가)의 감정과 영혼을 반영한다. 뭉크에게 외부 세계는 내면의 풍경인 셈이다.
뭉크는 '삶과 사랑, 죽음을 노래한 시'로 요약한 생의 프리즈 연작을 30년에 걸쳐 그렸다. 여기서 여성은 <살로메>(1894)나 <흡혈귀>(1895)처럼 강력한 유혹의 힘으로 남성을 무너뜨리고, <질투>의 노예가 되게 하거나 <이별>(1894)로 상처를 남긴다. 자유분방한 여인들과의 연예가 비극으로 끝나면서, 뭉크에게 여성과 사랑은 이처럼 고통과 파멸의 근원으로 자리 잡았다. 세기말은 그가 교류했던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1879)에서처럼 여성 해방의 물결이 일어났다. 더불어 매춘업으로 인한 성병의 증가는 남성을 파멸시키는 팜므파탈 도상의 유행을 낳았다.
생의 프리즈 연작에서 <신진대사 Metabolism>는 뭉크의 세계관을 담아낸 핵심적인 작품이다. 나무를 사이에 둔 알몸의 남녀는 아담과 이브를 연상시킨다. 독특한 목제 프레임 하단에는 나무뿌리 양옆으로 인간과 동물의 해골이 놓여 있다. 작품 제목처럼 나무는 죽음의 잔해 속에서 뿌리로부터 영양을 얻어 물질대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한다. 나무 몸통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태아는 남녀의 결합을 통한 생명의 탄생을 암시한다. 프레임 상단에 묘사된 도시는 인류의 근원이자 종착지인 천상의 예루살렘을 나타낸다.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흐름 안에서 연결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당시 북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범신론적 일원론(Monism)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과 동물의 육체는 썩어 자연의 자양분이 되고 다른 새로운 생명으로 피어난다는 생명의 순환을 말하고 있다.
이국을 떠돌다 1900년경 오슬로에 온 뭉크는 고향의 자연에서 큰 위안과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이때 노르웨이만의 피요르드와 겨울 풍경화를 여럿 그렸다. 하얀 눈과 나무, 피요르드의 바다가 어우러진 <겨울밤>은 다음 해 그린 대표작 <백야>와 흡사하다. 일렁이는 붓질과 오묘한 색채, 빛나는 별빛 때문일까. 전자보다 후자의 풍경이 생동하는 자연의 진동으로 더욱 신비롭다. 뭉크가 1890년대 자주 그린 파란 색조의 밤 풍경은 파리에서 교류하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한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의 시 <파란색 L'azur>(1864)의 영향도 지적된다. 파란색은 시인에게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상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갈망과 좌절을 동시에 불러오는 것이었다. 뭉크의 파란색 밤 풍경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런 실존적 고뇌를 느꼈다.
“자연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영혼 안의 그림, 눈 뒤에 그림인 것이다."
부유한 상인의 딸 툴라 라르센과의 연애는 뭉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결혼에 집착한 라르센은 1902년 자살 소동을 일으켰고, 둘이 다투는 와중에 권총이 발사되어 뭉크의 왼손 중지가 훼손되었다. 목숨을 잃을뻔한 이 사건은 뭉크에게 트라우마로 남았고, 다음 해 그는 화염에 휩싸인 <지옥에서의 자화상>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뭉크의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면서 몸과 마음이 상해갔다.
이 시기 풍경화에서 자연은 그의 불안과 고통을 반영한다. <튀링겐 숲>에서 저기 숲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유동하는 내장과 피처럼 날 것의 감정을 드러낸다. <가로수길의 새 눈>에서 열 지어 선 나무들은 불길한 유령처럼 전경의 아이를 짚어 삼킬듯하다. 뭉크는 보통 오랜 관찰을 통해 이런저런 인상들을 자기 내부에 흡수하다가 모든 것을 쏟아내며 몇 시간 혹은 며칠 만에 그림 완성했다. 화가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형태는 단순화되고 선은 마음 따라 흐르며 색채는 강화되었다. 채색은 평면적이지만 공간은 원근의 깊이감을 주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자연의 특성을 강조했다. 뭉크는 계절과 분위기 요소를 특히 중시하면서 내면의 상태나 심리를 풍경에 표현했다.
다행히 뭉크는 죽음이 아닌 삶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세기말 북구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5)를 뭉크도 반복해서 읽었다. 니체의 사후 초상화(1906)를 그리기도 했던 뭉크는 몸과 삶을 긍정하는 초인의 이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유행한 생기론(Vitalism)에 영향을 받아 1907년 독일의 휴양지 바르네뮌데에서 그는 나체로 바다 수영을 하고 햇볕을 쬐며 건강한 음식을 먹었다. 그 와중에 해수욕하는 남성들을 그리며 강한 남성성을 예찬했다. 그런데도 뭉크는 다음 해 쓰러져 코펜하겐의 병원에서 8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1909년 노르웨이에서의 전시가 주목을 받으며 뭉크는 이제야 고국에서도 인정받는다. 고향의 자연이 그리웠던 뭉크는 방랑하며 작업하던 생활을 접고 오슬로 근교의 크라게뢰에 정착했다. 술을 끊고 여자를 멀리하며 뭉크는 이름이 의미하듯 수도승처럼 지냈다. 자연의 활기와 생명력을 담아낸 풍경을 그리면서 점차 원기도 회복되었다. 오슬로 대학의 대강당 아울라 벽화 프로젝트(1911-16)에서는 생명의 근원인 광대한 <태양>을 중심에 두었다. 또한 자연과 교류하는 시골의 농부와 인부들을 그리면서 노동의 기쁨과 건강한 삶을 노래했다. 이때의 작품 <눈 내린 숲>을 보면 뭉크의 시선은 단순해지고 색채는 밝아져 풍경이 편안하다.
1916년 53세의 뭉크는 오슬로 외곽 에켈리에 거대한 영지를 구입해 남은 생을 보낸다. 식물원이었던 이곳은 온갖 나무와 꽃, 가축이 함께 어우러진 생명 가득한 안식처였다. 말년까지 화가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정원과 근처 숲 풍경을 자주 다루었다. <바람 속에 만개한 과일나무들>을 보면 뭉크의 내면이 더 밝고 풍요로워졌음을 느낄 수 있다. 풀과 나무를 뒤흔드는 바람으로 인해 자연의 에너지는 더욱 생생하게 전해진다. 바람이 불어야 식물이 잘 자라듯이 뭉크도 때때로 찾아오는 마음의 풍파 속에서 생산력을 높였다. 에켈리에서 그는 비바람이 불어도 노천에서 작업하기를 즐겼다. 뭉크는 작품을 자식으로 여길 만큼 아껴 판매도 꺼렸지만, 작품이 야외에서 거친 환경과 날씨에 상하는 과정 또한 작품의 일부로 여겼다.
에켈리에서 작업에만 몰두했던 뭉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을 휩쓴 스페인 독감도 이겨냈다. 매일 산책한 주변 숲에서 지속적인 영감을 받았던 뭉크는 특히 울퉁불퉁한 느릅나무 몸통을 즐겨 그렸다. <봄의 느릅나무 숲>처럼 그 형상에서 때때로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데, 이는 자연의 순환적 재생과 변형(metamorphosis)에 대한 화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가장 화려한 색채를 입은 가을의 숲은 그의 그림에서 색과 선의 놀이가 펼쳐지는 장이 되었다. 계절 따라, 혹 같은 계절이라도 화가가 느끼는 생기와 감정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형과 색은 인간이 느끼는 자연의 무한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여전히 즐겨 그린 겨울밤 풍경에서 화면을 뒤덮은 앙상한 나무 너머로 뭉크의 집이 보인다. 어두운 색감과 불안하게 유동하는 붓질로 인해 은둔자로 살았던 노년 화가의 쓸쓸함이 전해진다. 뭉크의 영혼은 여전히 떠돌며 자연과 인간, 자기 자신(자화상)을 탐험해 나갔다. 그의 그림은 세기말의 불안과 비관의 시대를 거쳐 20세기에 이어진 전쟁과 혁명, 파시즘 등 불안한 시대도 반영하고 있다. 개인적인 고통과 감정에서 시작한 작업은 점차 시대를 넘어선 보편의 이야기가 되었다.
말년의 <정원의 사과나무>에서 열매 가득한 사과나무는 공작새처럼 자태를 뽐낸다. 뒤쪽에 뭉크의 집과 그 앞에 한 커플이 보인다. 에켈리의 풍요로운 자연 풍경은 마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쯤 70대의 뭉크는 시력이 악화되어 한쪽으로 흐릿하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명랑하고 장식적인 풍경화는 생명이 주는 풍요와 그리기에 몰두한 화가의 기쁨을 전한다.
뭉크는 20세기 초 인상주의와 상징주의, 표현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을 추구했던 화가다. 독일을 기반으로 그곳의 컬렉터와 화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독일 표현주의를 탄생하게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후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규정되며 작품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뭉크가 소유했던 작품은 모두 오슬로 시에 기증되었고, 최근 신축한 미술관은 그의 전작품을 활용해 다양한 전시를 풀어내고 있다. 고통으로 절규하는 자신을 그렸던 병약한 화가가 긴 생애 동안 활기차게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연 속에서 살며 그 생명력을 그려왔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