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관한 쓸쓸한 퍼즐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by 라파엘


코엔 형제 감독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스릴러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걸작이다. 코엔 형제는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을 따옴표 없는 건조한 문체 그대로 스크린에 옮겼다. 덕분에 코맥 매카시의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서늘한 긴장감으로 충만한 영화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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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을 고려하지 않은 듯한 제목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1928년 발표된 예이츠의 시, 첫 구절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제목 탓에 노인을 학대하는 비정한 사회 고발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다. 그러다가 영화 내내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에게 희생되는 무수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 선입견은 이 영화가 ‘노인은 죽음 이외에 갈 곳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바뀐다. 그럼에도 ‘과연 돈가방을 둘러싼 추격전과 앞뒤 없는 살인행각이 다인가?’라는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인식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재미가 있는데 영화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영화를 다시 보니 곳곳에 단서들이 숨어있고 퍼즐이 하나 둘 맞춰지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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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늙은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의 독백이 흐르며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위로 짙은 어둠이 물러가면서 시작된다. 그렇게 태초부터 흘러온 거대한 시간의 강물이 세상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리고 영화의 배경인 먼지 휘날리는 텍사스의 황무지가 드러난다. 벨은 왕년에 누구든 세상을 어떻게 꾸려갈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 있느냐며 출옥 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겠다는 청년을 사형대로 보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동기 없는 살인이 횡행하는 세태를 한탄한다.


먼지 휘날리는 황무지, 동물의 사체, 마약 범죄 현장의 널브러진 시신들, 그리고 그 시신 곁의 거액의 돈가방. 르웰린 모스(죠슈 브롤린)는 우연히 발견한 돈가방을 거두고 안톤 쉬거는 르웰린을 뒤쫓는다. 그리고 무의미한 범죄에 장단 맞추고 싶지 않으면서도 범죄는 수사해야 하는 벨이 뒷북수사로 범행 현장을 확인하며 이들을 뒤따른다. 거대한 자연을 담아낸 압도적인 앵글들, 배우들의 명연기, 심장을 조이는 코엔 형제의 편집만으로도 영화는 훌륭하다. 여기에 잔혹한 살인마 안톤 쉬거가 ‘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보면 퍼즐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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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혹하기로 따진다면 시간만큼 가혹하고 무자비한 것도 없을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거두어 간다. 그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안톤 쉬거에게 희생되는 인물들은 모두 단지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영화 초반 어둠이 물러가고 밝아오는 세상은 ‘시간’이라는 주인공의 등장으로 볼 수 있다. 총격전을 벌인 범죄현장의 시신들이 풍화작용을 거쳐 황무지의 먼지로 섞이게 하는 것도 ‘시간’이 하는 일이다. 그가 총 대신 가축 도살용 공기통을 사용하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에선 뒤틀린 살인 행각으로 보이지만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의 죽음은 도살장의 가축을 처리하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는 섬뜩한 은유다. 가끔 쉬거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에게 ‘동전 던지기’라는 선심을 쓴다.-그렇다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동전 던지기를 맞힌 것일까? 쉬거의 ‘동전 던지기’ 제안에 르웰린의 아내가 외친 “동전은 결정하지 못해요. 당신이 결정해야죠”는 인간의 마지막 저항으로는 적절한 항변이다. “동전도 나와 생각이 같을 걸” 그녀가 안톤 쉬거를 만난 것도 운명이다.


살인마 안톤 쉬거를 ‘시간’으로 읽으면, ‘노인’은 생물학적으로 나이 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들을 붙들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며 인간이 놓치고 있는 ‘시간’의 속성을 일깨웠다. 여기서 ‘노인’은 흘러간 강물을 붙들려고 하는 사람이며 그가 강물을 잡으려고 하는 한 그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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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때 세상을 구원하는 주인공을 꿈꿨던 벨은, 지친 얼굴로 꿈 이야기를 건넨다. 그것은 춥고 어두운 곳에 먼저 간 아버지가 불을 지피고 자신을 맞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위안이다. 그렇게 “잠에서 깼다”라고 하는 벨의 마지막 대사는 중의적이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 그 위안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보안관 벨의 모습에 김동인의 단편소설 <무지개> 속 주인공 소년이 겹친다. 평생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쫓아 헤매던 소년처럼, 벨 역시 ‘완벽한 정의’와 ‘도덕’이라는 이름의 무지개를 쫓아 텍사스의 황야를 달렸다. 아름다웠지만 잊힌 소망, 그리고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대한 자각은 인간의 숙명인 걸까? 그래서 인간은 더욱 쓸쓸한 존재인가 보다.


이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보다 기괴한 단발머리의 잔혹한 살인마 안톤 쉬거가 어느 날 당신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경고가 인간의 나태함을 깨우는 강력한 펀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씨네필매거진에도 실린 리뷰입니다.

- 라파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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