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올로가 알려준 세상을 사는 방법, 무뎌지거나 미치거나

영화, 레올로

by 라파엘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편에 자리한 채 떠나지 않는 영화가 있다. <레올로>가 그렇다. 젊은 날, 문득문득 떠오르는 <레올로>의 장면들은 미소 짓게 했다가도, 남몰래 눈물을 훔치게 했다. 이상한 것은 VHS 비디오에 담긴 카피본의 조악한 한글 자막으로 보았고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았는데도, 나는 <레올로>를 최고의 영화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미 걸작으로 인정받았다. 세계적인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Roger Ebert)는 이 영화에 별점 만점(4개)을 주며 자신의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헌액했고,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2005년도에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100편을 선정하며 <레올로>를 포함시켰다.

감독 장 클로드 로종(Jean-Claude Lauzon)은 실제 몬트리올 빈민가 출신으로, 자신의 불우했던 기억을 이 영화에 투영했다. 그는 칸 영화제가 주목한 천재였으나, 단 두 편의 장편 영화만을 남기고 1997년 비행기 사고로 4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레올로표스터.png




영화는 소년 레올로의 성장기다. 아니, 그보다는 비루한 현실에 대한 어린 소년의 투쟁기, 혹은 진혼곡에 가깝다. 고전소설 <홍길동전>에서 서자 출신의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함에 절치부심했는데 레올로는 아버지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는 미쳤는데 자신은 꿈을 꾸고 있기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아버지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캐나다 몬트리올 빈민가에 사는 레올로는 자신의 뿌리를 이탈리아 시실리라고 여긴다. 영화는 레올로가 왜 이탈리아 사람일 수밖에 없는지 소년의 엉뚱한 상상력을 ‘토마토 수태설’로 풀어낸다. 이탈리아산 토마토에 농부의 정액이 묻었고 거리의 과일 좌판 위로 엄마가 넘어지면서 자신을 임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레올로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불리길 바란다.




레올로에게 가족은 애증의 대상이다. 배변의 중요성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버지, 거대한 몸집으로 가족을 짓누르듯 품는 어머니, 제정신이 아닌 형과 누나들, 그리고 모든 죄의 시작인 할아버지까지. 레올로는 살기 위해 글을 쓴다. 밤마다 냉장고 조명 아래 웅크리고 앉아 펜을 꾹꾹 눌러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나는 꿈을 꾼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되뇌면서. 그에게 글쓰기는 취미가 아니라, 미쳐가는 가족의 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유일한 비상구다.




레올로에게 옆집 소녀 비앙카는 여신이다. 소년은 상상 속에서 애타게 비앙카를 찾지만 현실에서는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비앙카가 닿을 수 없는 꿈이라면, 할아버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악몽이다. 레올로는 끔찍한 유전자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집안의 폭군이자 광기의 근원인 할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할아버지를 제거하려는 거사는 실패하고 말지만, 이는 레올로가 오물 같은 현실과 맞서 최선을 다해 투쟁한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이 실패를 통해 소년은 물리적 힘으로는 거대한 운명의 굴레를 끊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레올로는 장대한 꿈을 마지막으로 꾸고 나서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레올로에게 달려온 엄마는 말한다.

“레오, 내게 이러지 마.”

그녀는 소년이 자신만의 세계로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레올로의 육체는 구급차에 실려 가고 병원의 차가운 욕조 물속에 잠긴다. 그렇게 레올로는 현실에서 자신을 지우는 선택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레올로가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그 현실 속 가족의 단란함이다.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드는 데에는 레올로의 엉뚱함과 최후가 한몫하지만, 가족의 묘하게 행복한 모습은 어딘가 서글프면서도 미소를 짓게 한다. 낡은 차에 몸을 구겨 넣고 떠난 소풍이나 오손도손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 어딘가에는 분명 투박한 행복이 존재한다. 재밌는 것은 가족 모두가 정신과 진료를 함께 받는다. 그런 가족을 뒤로하고 소년의 영혼은 떠났다.




여기서 레올로의 주문, "나는 꿈을 꾸기 때문에 미치지 않았다. 나는 꿈을 꾼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렇게 해석된다. &미치지 않기 위해 꿈을 꾸고, 미친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기 위해 꿈을 꾼다.& 그렇게 레올로는 미치지 않기 위해, 세상에 머물지 않기 위해 영원히 꿈꾸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여리고 어린 영혼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제 이런 자문(自問)이 가능하다. 레올로의 영혼이 조금만 더 무뎠더라면 어땠을까? 마음에 굳은살이 박여 현실의 거친 바닥을 아무렇지 않게 디딜 수 있었다면, 그는 '레오'—가족은 그를 레오라고 부른다—로서 평범하게 늙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과연 미치거나 무뎌져서 살아내는 삶에서 레올로는 행복할 수 있을까?

소년 레올로에 따르면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은 모두 무뎌졌거나 미친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견디는 사람들이다. 어른들은 모두 미치는 임계점을 지나왔다. 그리고 그 지점을 지나기 전에 품었던 꿈들은 희석되었다. 영화 <레올로>가 미치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건, 그 꿈들이 비록 지워져 가지만 당신은 한때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씨네필매거진에도 실린 리뷰입니다.



-라파엘

작가의 이전글게으름에 대한 가장 둔중한 질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