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가장 둔중한 질책

영화, 시

by 라파엘





이분법적 도식에 따르면, 세상엔 시(詩)가 없어도 잘 사는 사람과 시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시가 사라지고 있다고 죽어간다며 안타까워하지만, 단언컨대 시는 사라졌고 죽었다. 서점에 가면 시집(詩集)이 있는데 왜 죽었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결단코 시는 죽었다.


이창동 감독은 강물 위를 떠내려오는 여학생의 시신에 타이틀을 띄움으로써 ‘시는 죽었다’고 강변한다. 이 강변은 오히려 ‘시’는 부활해야 한다는 감독의 다른 속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가 없이 살 수는 있지만, 시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라는 감독의 통찰이 써 내려간 ‘시’다.


영화에서 시는 마법을 부린다. 죽은 여학생이 살아나 관객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짓는 것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영화가 던지는 이 마법의 그물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정확히는 마법이 아니라 불편한 질문이다.


칸은 이 불편한 질문에 각본상을 수여했다. 영화를 본 순간부터 관객의 뇌리는 그 질문의 미세한 갈고리에 걸려든다. 그리고 관객의 가슴에 오래도록 자리하는 먹먹함은 그 후유증의 하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공한 영화다. 먹먹함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 '미자'에게는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이창동 감독은 시나리오 구상 단계부터 배우 윤정희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극 중 주인공의 이름 '미자'는 윤정희 배우의 본명(손미자)이기도 하다.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스크린의 스타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와,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단어를 잃어가는 60대 여성을 연기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영화적이다. 그녀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시나리오 속 미자가 아내와 너무나 닮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영화 속 미자의 소녀 같은 감수성은 배우 본연의 모습과 겹쳐지며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진정성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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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모든 장면과 대사는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돼 있다. 감독은 인물과 사건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불편한 질문이 담긴 하나의 무늬를 짜냈다. 늦은 나이에 시를 배우고 싶어 하는 미자는 한 문학 강좌에 참여하는데, 강사는 ‘시’는 무엇을 보는 것이며 거기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김용택 시인이 극 중 ‘김용탁’이라는 시인 역으로 직접 출연하여 설파한 시 창작론의 기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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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배우려는 미자의 순수한 욕망은 손자가 여학생에게 저지른 성범죄라는 현실과 충돌한다. 시를 쓰려면 아름다운 것을 찾아 노래해야 하는데, 현실은 비극과 고통의 연속이다. 영화 속 일상의 풍경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공유하는 그 평범한 풍경 속에는 누군가의 비극과 고통이 숨겨져 있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미자는 현실 속에서 시어(詩語)들을 하나하나 모아 간다. 미자의 주변 사람들은 미자가 무엇을, 왜 그렇게 오래 지켜보는지, 무엇에 감탄하는지, 왜 시를 배우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들과 미자의 차이는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의 유무다. 강좌가 끝날 때 시 한 편을 쓰라는 숙제를 하지 못한 수강생들은 “시가 너무 어렵다”라고 한다. 그러자 김용탁 시인은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한다. 시를 쓰고자 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을 미자처럼 볼 수가 없다. 그 사람들은 조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눈먼 자들이다. 그것은 시인의 지적처럼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서다.





이쯤에서 오래된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피터 위어 감독의 <죽은 시인의 사회>(1989). 두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기묘한 대구를 이룬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죽은 시인'들이란 이미 육체는 소멸했으나 그 정신은 살아남아 후대에게 삶의 정수를 가르치는 위대한 선지자들을 뜻한다. 그곳의 학생들은 억압적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동굴에 모여 죽은 시인들의 언어를 낭송하며 삶의 생기를 되찾으려 했다.


반면 이창동의 <시>가 보여주는 세계는 정반대다. 이곳은 시인이 죽은 게 아니라, ‘시(詩)’ 그 자체가 죽어버린 사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가슴속에 시를 품지 않는다.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아이들이 ‘죽은 시인'들의 언어를 빌려와 잠시나마 생을 찬미했다면, 미자의 방식은 더욱 처절하고 근원적이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 기어이 자신의 시를 써내어 시인이 되었고, 끝내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 죽은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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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문학 강좌 시간, 김용탁 시인이 미자가 제출한 시를 낭송하기 시작한다. ‘시 한 편을 써오라'는 숙제를 마친 사람은 치매를 앓는 미자뿐이었다. 다들 바빠서,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서라는 핑계로 숙제를 미룬다. ’ 숙제(宿題)'라는 단어의 한자를 파자하면 그 의미가 심상치 않다. ‘묵을 '숙(宿)'에 ’ 제목 제(題)', 즉 ‘해결되지 않은 채 묵혀둔 과제'라는 뜻이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기보다, 그것을 내일로 유예하고 외면하는 데 익숙하다. 시가 죽은 시대란, 어쩌면 모두가 이 삶의 숙제를 방기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자는 그 게으른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망치지 않고 숙제를 마쳤다. 낭송되는 시는 김용탁 시인의 목소리에서 미자의 목소리로, 다시 강물에 몸을 던졌던 소녀 희진의 목소리로 변모한다. 활자로 박제되어 있던 시가 낭송을 통해 산 자들의 시간 속에서 부활한 것이다. 시가 낭송될 때 스크린을 채우는 것은 미자가 머물렀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들이다.

낡은 아파트, 동네 슈퍼, 학교 운동장... 카메라는 미자가 사라진 빈자리를 비추지만, 세상은 아무런 균열 없이 평소의 리듬대로 흘러간다. 그것은 마치 “네가 사라져도 세상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기시감을 준다. 그 무심한 풍경 위로 미자의 시는 공기처럼 퍼져나간다. 미자의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의 진동은 텅 빈 공간을 메운다. 육체는 소멸해도 시는 남았다. 시는 그렇게 살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다리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던 소녀가 고개를 돌려 엷은 미소와 함께 눈으로 묻는다.


‘숙제는 다 했나요?’

‘눈먼 사람들 속에서 버텨볼 만은 한가요?’


영화 ‘시’는 어쩌면 우리의 게으름에 대한 가장 둔중한 질책이다.


/씨네필매거진에도 실린 리뷰입니다.



-라파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