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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현 Apr 03. 2022

저는 객관식이 익숙해요

미국 친구들의 신박한 대답

게임을 하나 해보자.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각자 하나씩 제시어를 정해야 한다. 제시어는 게임 진행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정해지는데, 그 질문은 "어렸을 적 죽도록 먹기 싫었지만 부모님의 강요로 인해 억지로 먹었어야 했던 음식은?"이다. 그런데 당신이 어렸을 적부터 편식하지 않고 모든 음식을 맛있게 잘 먹었더라면,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연기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항상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몸풀기 겸으로 학생들과 몇 가지 게임을 하신다. 오늘의 게임은 각자의 제시어로 서로를 지목하며 그 순서를 기억해내는 게임이었다. 교수님은 질문을 공개하면서 본인의 경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유'라고 했다. 망할 우유를 정말 먹기 싫었는데 매번 헛구역질을 참아가며 먹었어야 했다고 설명도 덧붙이셨다.


근데 문제는, 내가 어려서부터 먹는 걸 가리지 않았고 웬만한 건 다 잘 먹었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친구들은 오이, 호박, 당근, 라자냐 등등을 외쳤고 나는 순서가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졌다. 내 순서가 되었고, 나는 결국 'Spinach'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나는 시금치를 좋아하는데, 일단 게임은 해야 했으니 남들이 싫어할 법한 야채 중 아무거나 말해버렸다. 뭐, 다른 친구들이 듣기에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테고 게임 진행도 할 수 있었으니 괜찮았다. 정확히는, 특별히 관심받지 않고 무난하게 넘어가서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다음 차례였던 친구는 별안간 "I don't have one."을 제시어로 말했다. 나는 듣고 순간 놀랐는데, 다른 친구들과 교수님은 그저 게임을 진행할 뿐이었다. 싫어하는 음식을 제시어로 말하는 게임에서 제시어로 "그런 거 없어요"라니, 그 친구의 제시어를 듣고 보니 내가 제시어로 시금치를 굳이 골랐던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없으면 없다고 말하면 되는 거였는데.


일단 교수님이 싫어했던 '음식'을 말하라고 하셨고, 나는 그래서 음식의 범주 안에서 답을 찾아내려 했다. 친히 예시로 '우유'까지 말씀해주셔서, 흔히들 생각하는 편식의 대상인 식재료들을 우선 떠올렸다. 질문에서 요구하는 대답은 크게 두 가지였다. "어렸을 적 먹기 싫었지만 억지로 먹어야 했던 음식을 제시어로 말하라."에서 나는 제시어를 '말'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래서 내가 싫어했는지 좋아했는지는 아무 상관도 없었고, 남들이 내가 시금치를 싫어한다고 생각해도 그건 별 상관이 없었나 보다. 다른 하나는 정말 어떤 '음식'을 싫어했는지에 대한 거다. 글쎄, 지금도 그 두 가지 중 중요도를 가린다면 당연히 게임 진행을 위한 제시어 선택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교수님이 정말 내가 어떤 음식에 편식했는지를 궁금해서 물어봤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답 없음"을 '답'으로 고르는 방식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게 새로웠다.


학창 시절에는 5지선다형 객관식 답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 내가 했던 모든 공부는 철저히 객관식 답을 전제로 했다.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던 부모님 덕에 비교적 훌륭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아 다양한 형식의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에서 대입을 준비하면서부터는 확실히 객관식에 맞춰진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독서 토론이라던가, 논술이라던가, 말하기, 탐구 등등으로 이름 붙여진 학교 정규 시간 외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점차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시간은 줄어들고 시험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히는 공부만 해왔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더군다나 학구열이 높은 지역에 위치했어서, 눈을 뜬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나는 다섯 개의 객관식 선지 중에 답을 고르고, 정답지에 적힌 1부터 5까지의 숫자를 확인하는 작업을 무한 반복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가려면 수능을 쳐야 하고, 수능은 철저하게 객관식 위주의 시험이다. 수학 과목에 주관식이 있긴 하지만 풀이 과정은 평가에 반영되지 않고, 딱 떨어지는 숫자로 나오는 정답을 OMR 답지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마킹하는 것이니, 결국 객관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능이라는 시험은, 60만 명에 육박하는 수험생들의 답안지를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채점하고, 석차를 매기고, 등급을 나눠야 하는 아주 까다로운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답을 표기하는 방식을 간소화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야 가능한 시험이다. 우리가 객관식에 익숙한 이유다. 수능이라는 시험 자체에 대한 논의는 전부터 늘 있어왔지만, 난 여전히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인 평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연기 수업에서의 일로 다시 한번 내가 틀에 갇힌 사고를 반복한다는 걸 인지하고 나니, 어쩐지 좀 아쉬운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대학 수업을 들으면서는 '모두 고르시오'라는 질문에 답이 없거나 모두가 정답이거나 하는 일이 꽤나 자주 있었고, 선지 중 '정답 없음'을 마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획일적인 교육에서 조금은 벗어나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대학에 논술 전형으로 합격했단 말이다!


그래도 긴 시간 형성된 사고의 방식이라 그런지,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정말 별 것 아닌 일로 불쑥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정답이 있는 질문들에 훨씬 익숙했기 때문에, 단순히 개인의 선호를 물어보는 질문에도 뭔가 정답스러운 걸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던 것이다. 반면 미국의 친구들은 자신의 선호를 물어봤으니, 그냥 본인의 선호를 대답했다. 교환을 와서 한 학기를 마쳤는데, 전반적으로 한국은 아주 사소한 선호와 취향이라도 개인의 생각을 질문하는 일이 흔치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각자 개인적인 의사를 밝히는 데 주저한다. '결정장애'라는 말이 괜히 있지 않는 것이다. 아, 참 '답정너'라는 단어도 있었다. 답이 정해진 상황에 훨씬 익숙하고, 그래서 나의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정해진 답에 더욱 가까운 것을 말하려고 하는 본능이랄까.


그날 연기 수업에서 돌아와서 룸메들과 저녁을 먹었다. 수업에서 느꼈던 생각이 신기하고 재밌었기 때문에, 룸메들에게도 같은 상황에 대해 질문했다.


"만약에 너희가 어렸을 때부터 모든 음식을 잘 먹고 알레르기도 없었다면, 그래서 편식을 해본 적이 없어서 질문에 대해 마땅히 대답할 게 없으면 뭐라고 할 거야?"


"그냥 다른 애들이 대답했던 것들 중에 골라서?"

"응, 그냥 일반적으로 편식하는 거 말할 거 같은데? 당근 같은 거?"


룸메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이 나를 좀 위로했을까. 연기 수업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니, 다들 신기하다며 즐거워했다. 문화 차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이렇게 사소한 순간들에서 가장 크게 느껴진다. 사고하는 과정 자체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이 글의 요지가 한국의 교육 방식이 말도 안 되고 미국의 교육이 선진 된 것이라는 뜻으로 전해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세상에는 정해진 답을 찾아야 하는 일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일은 우리가 좀 더 익숙하게 잘하겠지. 다만,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다는 걸 단 한순간의 대답으로 느꼈던 경험이 신기했을 뿐이다. 개인의 의사 표현이 자유롭다는 건, 사뭇 다르게도 해석될 수 있다.


얼마 전, 라스베가스 여행을 가서 비틀스 쇼를 봤다. 서커스 공연이었고, 공연은 정시에 바로 시작했다. 공연사에서는 늦지 말라고 안내 메일도 보내왔었다. 당연히 우리는 시간에 맞춰 자리에 앉았고, 공연을 볼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하고 20분이 될 때까지도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입장했으며, 늦게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지인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허리를 숙이지도 않은 채 시야를 계속해서 방해했다. 대학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지각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는 지각을 하면 대개 뒷문으로 뛰어 들어와 가장 뒷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이곳 학생들은 늦어도 느긋하게 앞문을 열고 강의 중인 교수님 앞을 지나쳐 자리를 찾아간다. 교수님이 수업을 하시는 중간에도 질문하는 것에 상당히 관대한데, 문제는 방금 전 교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나 이미 공지로 올라간 내용, 자신이 조금만 검색해보면 알 수 있는 내용까지도 모두 질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질문이 자유롭지만, 그만큼 수업의 흐름이 끊기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런 질문들 사이에 존재하는 양질의 질문 하나를 위해 질문의 기회는 무한정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 중 어떤 것이 더 좋고 더 잘났는지는 관심 없다. 나에게 한국의 문화가 더 익숙하고 미국의 문화는 조금 낯선 것은 사실이고, 그런 차이를 경험할 때마다 새로운 관점이 생기고,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던 것들을 한 번 정도 낯설게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그런 기회들이 소중하다.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모든 차이들을 만든 것의 기저에는 어떤 문화와 환경이 존재하는지 생각해보는 경험이 뜻깊다. 겨우 게임하다 나온 다른 친구의 대답 하나로도 이 정도까지의 생각을 펼쳐볼 수 있다. 다양한 문화와 환경을 접하고 경험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요즘 새롭게 깨닫는 중이다. 이론으로, 남들의 말로, 다들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직접 피부로 경험하고 가슴으로 생각하는 과정이라 더욱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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