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가 조 바이든이라니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중, 내 친구 S는 협상 수업을 들었다. 함께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이던 S는 경영 전공생으로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팀플 지옥에서 살았다. 경영 전공 수업이었던 협상 수업은 매 시간 조별로 토론을 해야 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S는 내게 그날 수업에서 어떤 기막힌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줬다.
그날 협상의 주제는 남북한의 분단 문제였다. 남북한 분단 문제가 수업 주제였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S가 받아온 유인물에 적힌 각 협상 주체의 정체였다. 북한 측 협상 대표는 김정은. 그렇다면 남한 측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이름이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조 바이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분단 상황에 대해 협상하는 자리에, 남한의 대표로 미국 대통령이 참여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우리나라의 경제, 정치, 문화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고 하지만,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도 아닌데 국가의 정치적 협상에 국가 원수가 참여하지 않는 게 정말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국인들이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와 세계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지녔는지 모를 일이지만, 세계 유수의 대학 내 수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교수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한국 대표를 조 바이든으로 정한 걸까. 나는 그 수업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관점에서 진행된 수업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어떠한 경우에서도 국가의 정치적 문제가 협상의 대상이라면, 국가원수가 참여하지 않는 협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바쁜 조 바이든이 작은 변방 국가인 한국의 분단 문제 대표로 출석한다며 고마워해야 했을까.
미국에서 살면서 수많은 스몰토크에 노출되다 보니, 자연스레 미국인들이 한국 하면 어떤 것들을 떠올리는지 알게 되었다. I’m from Korea,라고 하면 가장 먼저 돌아오는 건 North? South? 이라며 자기들은 농담이라 생각하는 하나도 재미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North Koreans are definitely rude but you are not, so you would be from South, hahaha. (북한 사람들은 무례할 텐데 너는 아니니까 확실히 남한에서 왔겠구나, 하하하). 그들의 농담에 웃어줄 수 없었다. 같은 동포인 북한 사람들을 모욕해서? 아니다. 명백히 남한의 KOREA인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북한을 언급하는 그 태도- 진짜 궁금한 것도 아니면서 물어보는 그 태도! -가 불쾌한 것이다. 그런데 대학 수업에서 남한의 대통령은 협상 주체로 포함하지도 않고 떡하니 미국의 대통령을 남한 측 협상 대표로 앉힌다니, 믿을 수 없었다.
또 한 번은, 다른 친구가 듣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교양 수업에 청강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수업 첫 시간이었고 교수님은 한국 분이셨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굵직한 설명을 이어나가던 교수님께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언급하며 국민들을 탄압하고 자유를 앗아갔던 사람이 아직도 잘 먹고 잘 산다며 안타까워하셨다. 당시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미 생을 마감한 지 한참 지났을 때다. 수업을 듣던 한국인 혹은 한국계 미국인 학생들이 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고, 교수님께서는 몰랐다며 사과하셨다.
당시 이런 경험으로부터 나는 우리나라에 대한 국제적 인식에 대해 고민했었다. BTS의 빌보드 진입에 흥분한 뉴스가 쏟아지던 한국에서만 살 때는 전혀 알 수 없던 현실이었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게 사실이지만, 미국인들의 미국 중심 사고방식에 어떠한 작은 부분도 차지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위치를 직시했으며, 어쩔 수 없이 굉장히 씁쓸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경제 전공 수업을 들었는데, 한국은행 금통위 위원이셨던 박기영 교수님께서 한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교수님께서는 미국에서 박사를 하시던 때에 IMF에서 RA로 일하시고, 한국에서 금통위 위원이 되어 다시 IMF의 세미나에 참여하며 감회가 남달랐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IMF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런데 우리가 금리를 올리는 거랑 한국이 무슨 관련이 있어?"라는 질문을 들었다고 한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계 GDP 10위권 국가인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 미국은 아무런 이해도, 그럴 노력도 없다는 걸 다시 실감하며 내가 교환학생으로서 미국에 살면서 느낀 감정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진리이기 마련인데, 우리는 매력적인 것과 아쉬운 것에 관심을 가진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미국에 아쉬운 입장이기 때문에 미국 연준의 발표와 대선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미국은 우리나라가 별로 아쉽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다만 일방적인 구애에 대한 일종의 배신과도 같은 감정이 찾아온 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자신 있게 상대의 오류를 바로잡고 나의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세상에 그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들에게도 애써 노력해 관심을 가져 그들을 대신한 목소리에 힘을 실어줘야지. 세상의 불합리에 속상하고 불편하다면, 그런 불합리를 타개해야지, 적응하려 하지 말아야지. 세상을 향해 나의 존재를 보일 때는 절대 타협하지 말아야지.
"남북의 분단 문제를 다룰 때는 적어도 우리나라의 대표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