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와 썸머타임
3월 13일에 영국에 도착했던 나는 영국 마트에서 온통 토끼와 계란 모양을 한 초콜릿들을 잔뜩 봤었다. 아, 맞아 부활절이 곧이구나! 생각하고 혹시 그때 마트가 문을 닫는지 미리 확인했었다.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를 따라서 교회를 곧잘 따라갔지만, 머리가 좀 크고 나서는 할머니의 전도가 내게 먹히지 않았고 나는 스스로를 무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종교 생활을 하지 않다 보니 이런 이스터 시즌은 내게 그저 토끼 모양 초콜릿과 과자 에디션이 나오는 기간이었다. 샌디에고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에도 난 이스터 시즌에 마트에서 파는 토끼모양 리세스 초콜릿을 사 먹었을 뿐, 별 생각은 없었다.
지난 금요일에 대영박물관을 가보고 싶어서 예약 사이트를 찾다가 이런 안내를 발견했다. 원래 금요일에는 박물관 운영 시간을 연장해서 저녁 8시 30분까지 하는데, 딱 저 Good Friday, 3월 29일만 연장 운영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Good Friday가 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구글링을 시작했고 그제야 부활절 연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영국에서 부활절과 관련해 Good Friday와 Easter Monday, 이렇게 부활절 직전 금요일과 직후 월요일이 bank holiday, 즉 공휴일이다. Good Friday라는 표현이 조금 신선해서 찾아보니, 이게 곧 '성금요일'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일이고, 삼일 뒤에 부활하신 부활 주간까지 함께 기념해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이어서 부활절을 기념하는 문화라고 한다. 영국이란 나라가 기독교를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활절 휴일은 아마 크리스마스와 함께 최대 명절이 될 것이니 부활절과 관련한 공휴일이 둘이나 존재한다는 것도 놀랍진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교회나 성당을 다니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은 부활절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때문에, 이곳에서 부활절과 관련한 공휴일 개념이 꽤나 신기하게 다가왔다. 사실 한국의 명절처럼 가족을 보러 가고, 명절 음식을 해 먹는 것처럼 떠들썩한 분위기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같은 플랫에 사는 폴란드 출신 부부가 이스터를 기념하기 위한 저녁 식사 준비를 열심히 하고 계시는 걸 봤다. 그러다가 폴란드에서는 이스터에 물을 뿌리면서 서로의 축복을 빌어주는 문화가 있다는 것도 알려주셨는데, 연세 지긋하신 분께 감히 물을 뿌리기가 어려워서 주춤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영국인 친구한테 물어보니, 요즘은 이스터 자체를 챙기는 사람들보다는 그냥 일을 안 하는 연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했었다. 다만 아이들은 초콜릿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아하긴 한다고.
우리나라는 종교적 색채가 강하지 않은 국가라서 이런 특정 종교의 기념일과 그 성격이 나라 전체의 분위기를 구성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굉장히 흥미롭다. 이번 부활절을 영국에서 보내면서 Good Friday와 Easter Monday 표현을 처음 안 것도 사뭇 즐거운 경험이다. 그리고 이번 해에는 공교롭게 써머타임 시작일이 부활절과 겹치면서 샌디에고에서 써머타임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써머타임이 되면서 내가 지내는 런던과 한국의 시차가 9시간에서 8시간으로 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써머타임이라고 하기에 런던은 아직도 날씨가 이상하리만치 추운 날이 계속되고 있지만, 써머타임 적용으로 해가 엄청 늦게 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 걸 보면 써머타임의 효력이 있기는 한가 보다.
샌디에고에서 써머타임은 새벽 1시에서 갑자기 3시로 바뀌면서 시작되었는데, 그때 당시에도 한국인인 나는 언제 이렇게 시간이 늦었냐며 멀쩡히 보던 폰을 멀리하고 갑자기 잠에 들려고 했었다. 샤워 중이던 룸메이트는 자기가 샤워를 한 시간을 넘게 했냐며 놀라서 얼른 이부자리를 정리했었다. 새벽 1시였으면 받았을 엄마의 페이스톡을 거절하고, 엄마 여기 지금 새벽 세시야 나 자야 돼, 했었다. 나중에 깨닫고 정말 어떻게 그 시간이 진짜라고 다들 생각했을까 한참을 신기해했었다. 써머타임 적용으로 사람들이 과연 한 시간 일찍 움직이게 될까? 대체 이게 무슨 정책이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우리의 모습에서 증명된 재밌는 경험이었다.
나는 아직 런던에서 직업이랄 게 없어서, 사실 공휴일이고 Easter Holidays고 뭐고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부활절 연휴에는 정말 게으르게 연휴를 보냈다. 하던 일도, 수업도 미루게 되었고 침대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시금 사람이 환경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사회에서 정해주는 규율과 여러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상식의 존재가 나의 행동과 생각을 상당 부분 구성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의 나와 미국에 있던 나, 그리고 지금 영국에서 생활하는 내가 모두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이제 종종 생기고 있다. 한국이었으면 역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지나쳤을 부활절에 대해 검색해 보고, 영국의 공휴일 체계를 조사하고, 사람들이 이스터 연휴를 어떻게 대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던 것처럼 새로운 환경이 주는 특별함을 계속 누릴 수 있기를 이 글을 빌어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