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행복을 찾아왔어요

즐겁고 행복한 건, 쉬운 게 좋잖아요

by 미현

영국에 온 지 1년 10개월이 지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에서 학생 비자로 변경하는 계획을 성공시키면서 조금 더 오래 런던에 머물게 되었다. 그간 완성된 글을 정리해 내기가 영 어려워서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다가, 2026년 새해를 사흘 앞두고 갈피 없이 흩어지는 생각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2024년 3월, 한국에서 영국으로 향할 때 스타벅스 연말 프리퀀시 이벤트로 받은 다이어리를 하나 들고 왔었다. 며칠 뒤 시작될 2026년을 맞이할 다이어리를 일찌감치 장만해놓고 1월 1일에 시작하는 첫 장을 채우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서랍장에 박혀있던 지난 일기들을 꺼내 읽었다. 지난 2년 간의 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나. 기록으로 남겨진 나의 짧은 글들을 소재 삼아 영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의 감회를 남겨나 볼까.



영국으로 오기 전, 2024년 초 나의 일기장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혔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내가 좋아하는 최재천 교수님과 조승우 작가님의 유튜브를 정말 많이 봤다.
평소 책을 너무 안 읽고 사는 것 같아서 밀리의 서재 구독도 해보고, 동네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왔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들을 만나면, 이제 더이상 친구들이랑 아무 의미 없이 잠깐 웃고 마는 그런 농담만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싫어졌다.
사실, 영국에 도망가는 거면 어떡하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고 도망치는 거면?
한국에서 당장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기에는 내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어떻게 살고 싶다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것 같다.
행복하게 살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 할까? 지금도 주변 친구들보다 사실 늦은 거면 어쩌지? 영국에 가는 게 내 커리어를 다 망치고 내 미래 연봉을 깎아먹는 바보같은 짓이면 어떡하지?


영국에 온 뒤 2024년 7월, 나의 일기장에는 다소 시답잖은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있었다.

카페에 출근해서 아침에 어떤 빵을 먹을지 고민하다가 오븐에 내가 먹고 싶은 빵은 슬쩍 하나 더 넣어 구웠다.
한국에서는 할 생각도 안 했던 미라클 모닝을 영국까지 와서 하고 있다. 매일 아침 6시까지 카페로 출근하려면 4시반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걱정했던 것보다는 너무 능숙하게 잘 해내고 있다.
퇴근을 해도 해가 중천에 떠있는 오후 1시여서, 수영을 다녀오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다. 뭔가 갓생 사는 기분?
이 동네에, 이 나라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게 이렇게 좋다니. 도피가 적성인 듯.
런던은 그래도 영국 악센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심하지 않은 것 같다. 혹시 못 알아들을까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거 같다.
오늘 한국에 있는 세연이랑 통화했는데, 나보고 얼굴이 훨씬 좋아졌다고 했다. 진짜 퍼스널 컬러가 외국이냐면서. 혼자 외국 나가 살면서 힘든 게 아니라 오히려 애가 더 건강해진 것 같다고. 그런가?


LSE 석사를 시작한 2025년 9월, 나의 일기장에는 온통 새로운 공부에 대한 열정과 기분 좋은 기대가 쌓여있다.

혼자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니까 괜히 설레고 신나서, 혼자서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첫 학기가 끝난 2025년 12월, 난 일기장에 이런 생각들을 적고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오만한 걸까? 개발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는 가난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보다, 내가 공부한 경제학이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공부가 재밌구나? 주변에서 눈치채기 시작했다. 같은 경제학을 배워도, 논술 경쟁력이 제일 낮아 선택했던 대학 입시때와는 너무 다른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거겠지. 학교 가는 게 재밌다.



영국에서 나는 내내 쉽게 행복해지는 연습을 했다. 영국 카페에서 일하던 워킹홀리데이는 "학생 정도면 그래도 기득권이에요" 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계속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알게 했다. 내가 별거 아니라는 사실의 확인. 내가 특별하고 대단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확인.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하루들을 보내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위로였다. 그래서 하고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건 순전히 나의 행운이라, 가슴 벅차게 행복할 수 있었다. 나는 여기서 원대한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매일 잠깐씩 웃을 수 있어야 더 자주, 쉽게 행복했다.


나의 세계가 넓어진다는 건, 세상에 수백만 가지 저마다의 인생이 존재한다는 걸 목격하고, 내가 알던 단 몇 가지의 인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흘려보낼 당연한 하루가 누군가에겐 숨이 턱 막히는 치열한 하루라는 걸 곱씹게 되는 매일이었다. 영국이라는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디에서든, 내가 선택한 하루를 보내고, 이어지는 내일을 기대하는 순간들은 나한테 같은 걸 가르쳐줬을 거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나는 런던에 있지만, 다가오는 새해에도 나의 하찮은 인생에 대해 사치스럽게 고민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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