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현장 에세이 [02.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불가능한 디렉팅은 없다, 증명하거나 떠나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20년 만에 후속작을 발표한다. 원작의 주역들이 다시 뭉친다는 소식에 팬들의 기대가 뜨겁다. 나 또한 패션에 무지하던 인턴 앤디(앤 해서웨이)가 ‘미란다의 오른팔’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감명 깊게 본 팬으로서, 오랜 시간을 돌아온 후속작이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지 무척 설레는 마음이다.
영화 속 미란다 편집장이 앤디에게 던지는 요구들은 얼핏 보면 지독한 갑질처럼 보인다.
하지만 필름 시대의 끝자락에서 시작해 디지털 시대에 이른 지금까지, 빠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여전히 현장에 몸담고 있는 내 시선에서는 "아 나도.. 해봤던 일 같은데..?"라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사실 이 무자비한 폭력들은 흡사 내가 겪어왔던 내 어린 시절 현장 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다.
“해 지기 전까지 엑스트라 500명을 이 좁은 골목에 배치해 촬영을 마쳐야 한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운데, 낮 장면으로 촬영해 내라.”
상업 현장은 매 분 매 초가 곧 자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들을 해냄으로써 각자의 가치를 증명하는 시험대에 오르곤 한다. ‘방법’을 찾아오는 사람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이 현장의 아이러니한 문법이다.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성취는 공간이 캐릭터의 권력을 대변하는 방식에 있다.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의 집무실은 단순한 사무실이 아니라 하나의 ‘성역’이자 그녀가 업계에서 쌓아 올린 자부심 그 자체다. 결벽증에 가까운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 완벽한 대칭의 가구 배치, 그리고 거대한 통창 너머 보이는 뉴욕의 마천루는 그녀가 이 도시의 정점에 있음을 시각적으로 선포한다. 카메라는 미란다를 포착할 때 주로 로우 앵글(Low Angle)을 사용하여 그녀를 압도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앤디가 그 공간에 들어설 때 발생하는 시각적 불협화음을 통해 ‘침입자’와 ‘지배자’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면 앤디의 성장은 철저히 시각적인 ‘변신’을 통해 증명된다. 초반부 앤디의 헐렁한 니트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개인’을 상징한다. 그러나 샤넬 부츠와 가이 라로슈 코트로 무장하기 시작할 때, 그녀는 시스템의 문법을 습득한 ‘프로’로 변모한다. 여기서 미장센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태도의 갑옷’이 된다.
영화는 화려한 런웨이와 그 이면의 처절한 생존 경쟁을 교차시킨다. 연출자가 매번 마주하는 상업 현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니터 안의 완벽한 그림은 카메라 뒤 수많은 스태프의 열정과 땀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미란다가 던지는 “That’s all”이라는 대사는 우리 현장의 ‘컷(Cut)’과 닮아 있다. 모든 감정과 변명을 배제하고 오직 결과물로만 대화하겠다는 선언이자, 단 한 마디로 모든 책임을 지는 리더의 무게감이다. 이 영화에서 미장센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완벽을 향한 광기 어린 집착이 만들어낸 ‘전투의 흔적’이기도 하다.
전해지는 소식에 따르면, 속편은 이제 편집장이 된 앤디와 디지털 매체 시대에 직면한 미란다의 대결을 다룬다고 한다. 종이 잡지의 시대가 저물고 인플루언서의 시대가 온 지금, 미란다가 자신의 ‘아날로그적 완벽주의’를 어떻게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할지가 이번 편의 가장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2편의 시각적 언어는 아마도 ‘과거의 영광(Classic)’과 ‘현재의 속도(Digital)’ 사이의 충돌이 될 것이다. 앤디는 이제 미란다와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만의 미장센을 구축했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또 다른 악마가 되어 있을까? 이 신구(新舊)의 대립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1편에서 앤디가 미란다의 신뢰를 얻은 결정적 순간은 그녀가 미란다의 ‘언어(패션)’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룩’으로 증명했을 때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과거 클래식의 자부심을 유지하면서도 변화에 순응하고 배워가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결국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프로의 세계에서 당신의 실력은 당신이 만든 프레임 안의 디테일로 증명된다."
2편의 미란다가 이 변화의 파도 속에서 어떤 성장을 보여줄지, 그녀의 새로운 '디테일'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