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현장 에세이 [08. 영화 'F1 THE MOVIE']
"전략이 아니라 기회를 만들어야지 희망은 전략이 될 수 없어"
우리나라에서는 비인기 종목으로 각광받지 못하지만, 전 세계 스포츠 선수 중 최고 연봉을 받는 글로벌 팬덤을 보유한 F1이 드디어 영화로 나왔다. 그간 F1 관련 다큐멘터리들이 흥행 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던 것과 달리, 이번 <F1 THE MOVIE>는 강렬한 인상으로 한국 팬들을 사로잡았다.
영화의 주인공 소니는 한때 F1의 유망주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꿈의 무대를 떠나게 된다. 이후 데이토나 같은 하위 리그를 전전하고, 심지어 뉴욕의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도 그는 결코 차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옛 친구 루벤의 제안으로 소니는 노장이 되어 다시 꿈의 무대 F1으로 돌아오며 영화는 시작된다.
떠나지 못함. 결국 이루고 싶었던 마지막 그 꿈에 대한 미련,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남아 우리는 그 주변을 맴돌고는 한다. 나 또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머물며 영화와 드라마로 다 이루지 못한 개인적인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타 리그를 맴돌며 견뎌내고는 한다.
오늘 영화 <F1 THE MOVIE>를 통해 그 '머무름'과 '맴돎'에 대한, 견뎌내는 자의 마음가짐과 소통법에 대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F1은 철저히 데이터에 의해 지배된다. 타이어의 마모도, 연료 잔량, 최적의 진입 각도까지 실시간으로 계산되어 드라이버에게 전달되지만, 그 데이터를 넘어 드라이버들이 최고의 연봉을 받는 것은 알고리즘이 닿지 못하는 '0.1초 영역'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소니가 F1 레이싱카로 복귀해 처음 스티어링 휠을 잡는 장면을 보라. 수년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그의 몸은 차체와 하나가 된다. 영화 초반, 소니가 차 주변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단순한 미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궤도'의 유지이자 '감각'의 날 세움이었다. 우리가 어떤 업계를 떠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이유는, 언젠가 돌아갈 '중력의 중심'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메인 필드에서 잠시 밀려나거나 프로젝트가 중단되면 많은 이들이 아예 트랙 밖으로 나가버린다. 하지만 진짜 승부사들은 트랙 위의 핸들을 놓지 않는다. 맴돎은 멈춰있는 정체가 아니라, 다시 가속 페달을 밟을 순간을 위해 엔진을 예열하는 준비 과정이다. 궤도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행성처럼, 언젠가 찾아올 기회의 인력에 이끌려 다시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기 위한 '공전'의 시간인 셈이다.
노장이 되어 복귀한 소니는 데이터와 수치에만 의존하는 젊은 드라이버들, 그리고 효율만을 중시하는 스태프들과 사사건건 충돌한다. 여기서 영화가 보여주는 소통법은 흥미롭다. 그는 말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트랙에서 느끼는 미세한 진동, 타이어가 지면을 움켜쥐는 감각, 즉 '몸의 언어'로 소통한다.
특히 조슈아가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고도 기자들 앞에서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일 때, 소니의 묵직한 태도는 대조를 이룬다. 소니는 세대 간의 충돌을 '경험'이라는 이름의 엔진으로 돌파해 나간다. 시뮬레이터 교육에 익숙한 '지식'의 세대 조슈아와, 수만 번의 주행으로 몸에 길을 새긴 '지혜'의 세대 소니의 대립은 단순히 구세대의 고집이 아니다.
우리가 업계 주변을 맴돌며 견뎌낼 때 필요한 소통도 이와 같다. 화려한 수사나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한 끗'의 감각을 동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때 맴돎은 비로소 권위가 된다. 타 리그에서의 경험을 메인 리그의 문법으로 치환해 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필살기다.
소니는 불필요한 감정 소비를 하지 않는다. 짝짝이 양말, 헤드폰 음악, 카드 등 소니는 그저 자신의 루틴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행운의 카드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트랙을 직접 뛰며 노면의 상태를 분석하며, 홈 트레이닝과 얼음찜질로 신체를 최적화한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루틴 속에 침잠함으로써 외부의 냉소와 불필요한 감정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오직 승리에 초점을 맞춘다.
소니에의 승리를 향한 승부사의 기질은 영화 속 곳곳 드러난다. 팀에 들어온 초기 승리를 향한 과격한 드라이빙 스타일은 같은 팀을 비롯한 리그에서 조롱받으며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같은 팀 드라이버인 조슈아가 큰 사고를 겪으며 시즌 Off를 하게 되지만, 모두가 자신을 비난해도 소니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한다. 그리고 팀을 최고 성적 5위까지 올려놓으며 팀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하며 팀의 드라이버로써 인정받게 된다. 이처럼 자신을 주변에 인정시킨다는 것은 단연 운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철저한 루틴 속 반복되는 성실함과 끈기.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 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트랙에서 엔진을 끝까지 돌릴 준비가 되었는가?"
0.001초를 다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소니 같은 노장이 버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만의 루틴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스스로 지키는 소니처럼, 우리 역시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드라이빙 라인'을 찾아야 한다. 어떠한 압박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루틴이야말로, 무너지지 않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소음일 뿐이야.
차나 몰아 Drive the car
레이싱은 드라이버의 단독 질주가 아니다. 두 명의 드라이버가 한 팀을 이루며, 메카닉을 포함한 모든 스태프가 0.01초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초정밀 팀 플레이'다. 영화에서도 소니와 조슈아 사이의 미묘한 경쟁과 협력은 핵심 축을 이룬다.
영화 초반, 소니는 조슈아에게 순위를 내주라는 데스크의 말을 무시하고 차를 전복시킨다. 아직 팀이 되지 못한, 승리에 대한 간절함을 조슈아에게 전달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즌이 진행되며 소니는 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페이스를 늦추고 뒤따라오는 경쟁자를 막아주는 '윙맨(Wingman)'의 역할을 자처하며 조슈아와 사람들에게 팀에 대한 의미를 전달한다. 단순한 양보가 아닌, 팀 전체의 포디움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전략적으로 통제하는 베테랑으로써의 전략을 말이다. 그렇게 팀은 서로의 공백을 채우며 결승선을 통과한다. 노장의 노련함과 신예의 패기가 결합했을 때, APXGP 팀은 비로소 폭발적인 가속력을 얻게 된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좋은 본보기와 서로 시간에 대한 리스펙은 팀을 더 강하게 만든다. 그렇게 소니는 남들의 시선 속에 나아가지 못하던 조슈아를 변하게 만들며 완벽한 승리를 위한 팀원으로써 조슈아를 성장시켜 낸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니의 경험에 과감히 투자했던 루벤도, 돌아온 소니도, 그리고 조슈아를 비롯한 모든 APXGP팀은 이렇게 하나로써 감동의 전율의 눈앞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다.
영화 후반부, 소니의 건강 상태를 안 루벤이 소니를 팀에서 쫓아내지만, 자신의 신체를 포기하며 소니는 트랙 위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건 마지막 레이스를 펼친다.
그는 단순히 실력만 내세우는 노장이 아니었다. 세이프티카 상황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팀에게 첫 승점과 5위권 진입을 안기며, 자신을 기다리는 팀원들에게 당당히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팀에게 돌아와 마지막 레이스에 오른다.
다시 F1 머신에 올라 소니가 엔진 회전수를 한계치인 '레드라인(Redline)'까지 끌어올리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He's Flying(그가 날고 있어)"라는 감탄사처럼, 그것은 단순히 이기기 위한 질주가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맴돌았던 꿈에 대한 뜨거운 '예우'처럼 느껴진다. 결국 소니는 팀원들과 친구 루벤과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세계 정상에 선다.
결국 인생이라는 레이스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포디움 위에 있느냐가 아니라, 여전히 트랙 위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소니 헤이즈가 택시 핸들을 놓지 않았기에 다시 F1 시트에 앉을 수 있었듯, 우리도 각자의 위치에서 맴돎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나 또한 엔터테인먼트라는 트랙 주변을 맴돌며 언젠가 찾아올 나만의 '마지막 그랑프리'를 기다린다. 다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위해 타 리그에서 견뎌내는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 맴돎이 길어질수록 트랙의 굴곡은 더 선명하게 보이고, 다시 핸들을 잡았을 때의 절박함은 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지금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 언저리를 서성이고 있다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자. 당신은 지금 다음 랩(Lap)을 위해 가장 뜨겁게 엔진을 데우는 중이다. 견뎌내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그 마지막 한 바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조슈아가 사고로 재활 중, 조슈아의 엄마는 묻는다.
"아직 이 일이 좋니?"
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