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학원 선생님께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 한 말이었다. 선생님은 이어 우리는 부모님들이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는데 대체 무엇이 힘드냐고, 우리가 힘든 이유가 여유롭고 나태해서 그런다고, 어른이 되면 자신을 오롯이 책임지기 때문에 힘들지만 의식주가 해결된 상태의 우리가 어떤 우울을 겪어봤자 그건 진짜 힘든 게 아니라고 연신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선생님의 말속 거뭇하게 일그러진 나의 과거들이 눈앞을 천천히 스쳐갔다. 처음 겪어보는 절망에 어쩔 줄 모르고 몹시 불행에 휘둘리던 날들과 선생님이 말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잔뜩 엉켰다. 내 우울이 나태와 여유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그토록 아파왔던 시간들은 어떻게 설명할 건지, 대체 그 어른의 농익은 우울은 얼마나 끔찍하길래 이 고통조차 귀여운 수준인 건지, 묻고 싶은 게 천 개는 더 있었다. 그러나 난 단지 고개를 숙이고 교실의 구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표현이었다.
"서연아, 너 어디 보니? 멍 때리지 말고."
나는 그 말을 듣자 심지어 화까지 났다. 그렇지만 난 아무렇지 않게 그저 허허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업 내내 집중이 안되었다. 선생님이 했던 그 말들을 수없이 삼켰다. 내가 버텨온 수많은 시련들이 단지 여유로워서, 나태 때문에 그런 거라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죽을 각오로 버텨왔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내가 아파하고 힘들더라도, 어른들은 내 고충을 가볍고 심지어 귀엽게 생각할 거란 생각에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내 아픔과 고난은 명함조차 못 내밀고 인정받지도 못한 채로 이렇게 치부되는구나. 선생님의 말이 곧 내가 어른들로부터 들을 말이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단지 어리고 사회생활을 못 해봤다는 이유로 이렇게 쉽게 남의 아픔을 함부로 판단하다니. 나는 문제집에 인쇄된 굵은 글자 위로 샤프를 세게 눌렀다. 샤프심이 통, 튀어나갔다.
10대는 몇십 년, 아니 사실 백몇년일지도 모르는 삶 속에서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태어나 처음 마주했던 행복과 절망은 우리의 영원한 잔상이 되어 아주, 많이, 오래도록 우리 곁을 맴돈다.
우리는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즐거웠고,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두려웠다. 10 대란 길을 걷는 것은 마치 아무런 방패나 철갑 없이 온통 화살이 빗발치고 폭탄이 넘나드는 곳을 걸어가야 하는 것 같은 막막함과 두려움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맞아버렸던 수많은 화살들과 끔찍한 폭탄으로 인해 몸 구석구석에 흉터가 생겼다. 우리는 그 파릇파릇한 상처처럼 맑았다. 신선한 향이 나는 짙은 상처 내음을 맡으며 우리는 우리의 우울을 키워갔다. 무엇도 막지 못할 절망으로 달음박질하며, 성장이라는 대단한 이유로 패배의 수렁에 갇히기도 했다.
20대가 그렇듯, 30대가 그렇듯, 10대도 10대 만의 힘듦이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좋은 대학이 아니고서는 사람 취급도 안 해줄 거라며 겁을 주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도 전에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단념하는 법을 가르치고, 친구와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가치인 우정보다 저 친구를 이겨야 한다는 경쟁욕구를 심게 했다. 우리는 선택의 원료로 쓰일 경험이 없기에 어른들의 말에 휘둘리며 다른 이들의 경험을 베끼고, 다른 이들의 감정을 빌렸다. 어설프게 따라한 경험과 감정에 억지로 의존하며 불안한 마음을 숨겼다. 우리는 패배도 승리도 무승부도 처음이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몰랐던, 그 애매한 무지는 거대한 가능성 앞에 있는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슬픔은 인정받지도 못한 채로 사춘기라서 그래,라는 그 한마디, 그 잔인한 한마디에 너무나 쉽게 일그러졌다.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어른들은 우리의 신음을 귀여운 투정으로 넘어가길 십상이었다. 투정도 아니었다. 잠깐 스칠만한 감정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통의 2배가 넘는 정신과 약을 삼키는 내 친구는 무엇이 되는가. 가정에서의 지겨운 불화 때문에 집에서 뛰쳐나와 내게 연락했던 내 친구는 무엇이 되는가. 끔찍한 따돌림으로 내 앞에서 울고 마는 내 친구는 무엇이 되는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서 있는 친구에게 제발 죽지 말아 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던 나는 무엇이 되는가. 온통 칼자국으로 가득한 내 친구의 팔은 대체 무엇이 되는가.
우리에겐 우울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인가.
청소년 걸그룹 멤버가 흔한 요즈음, 10대를 소재로 삼은 아이돌 음악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청순하고 풋풋한 10대의 싱그러움을 주제로 노래하는 걸그룹은 보기만 해도 상쾌한 느낌이다. 그들은 10대의 벅차오를 만큼 상큼한 추억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노래하는 그들은 환한 나비처럼 빛난다.
그러나 여기, 트리플에스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10대의 지긋한 우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맑고 예쁜 날들을 보여주는 이들 앞에서, 어둡고 칙칙한 우울함을 꺼내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우울을 꺼낸 창작이란 그 어떤 형태인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니까. 트리플에스의 'Girls never die'는 그런 곡이다. 아름다운 청춘이 가진 아픔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며,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고,
그 어찌할 줄 모르던 해맑음으로 세상과 맞서 기어코,
수없이 쓰러져도 결국은 다시 일어날 거라고.
역시나 트리플에스는 보란 듯이 그들만의 매력을 멋지게 증명해내고 있다. 잔인한 아이돌 음악 시장에서 살아남은 소녀들이, 또 다른 분야에서 고통받고 있을 10대에게, 더 나아가 아픈 10대 추억을 붙안고 사는 성인들에게까지, 우리처럼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보상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그 무엇보다 짙은 공감과 진실성 있는 위로를 건네고 있다. 고통, 시련, 고난을 다듬어 '내'가 될 것이라고. 그 어떤 것보다 반짝이는 진주 같은 본질이 되자고.
보잘것없는 슬픔이 극복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무섭기만 했던 가능성 앞에서 당당히 발을 내밀게 만든다. 무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침없는 10대의 실천력의 근원은 그토록 미워하고 두려워했던 '처음'이었다. 우리는 처음이기에 세상이 준 가혹하고 잔인한 시련 속에서, 난초처럼 굵직하게 견디어낼 수 있었다. 우리를 겁먹게만 했던 막막한 가능성이 원하면 무엇이든 삶을 꾸려 나갈 수 있게 하는 정확한 기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