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일까. 소위 말하는 ’이쁘게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특별히 이쁘게 말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것을 지향하려 했던 적은 있다. 이런 이야기는 흔히 하는 것들이다. “참 말을 이쁘게 한다”, “말 이쁘게 하는 사람이 좋아”라는 식의 말들. 나도 한때는 나름대로 이쁘고 좋은 말과 가까워지려 노력했던 적이 있다. 일상에서는 아니지만 적어도 글을 쓰거나 읽는 순간 만큼은 그랬다.
말을 이쁘게 한다는 건 무엇일까? 착하게 말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상대를 배려해서 말한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저 진실되게 이야기하는 건 소위 예쁜 말이 아닌 걸까?
오래되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런 단어와 문장들이 꽤나 좋았던 시기가 있었다. 시가 좋았고, 고뇌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미적이고도 진심을 담은 대사들이 좋았다. 우리 말은 말 그대로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꽃, 별, 푸른색, 밤하늘 등 감각적인 것들에서부터 그리움, 아쉬움, 아련함, 진심 등 추상적인 감정명사들까지. 이런 말들 자체가 주는 묘한 안정감 때문일까.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20대 초중반에 썼던 시들과 일기를 생각하면 미학적인 감각을 최대한 살리고자 애썼던 것이 떠오른다. 내용 자체는 특별할 것 없어도 이러한 언어의 요소가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말의 고귀함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게 더렵혀지는 것이 싫어 몇 년 간은 욕설도 거의 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러한 언어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그처럼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문장보다 조금 건조하지만 단호한 느낌을 주는 문장에 좀 더 끌리는 나를 발견했다. 그건 아마도 보다 직접적인 언어가 뜻을 명쾌하게 만들어주고, 탐구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잘 이해하게 해주면서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이 중요한 것만 남겨놓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반대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졌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명료하고 직설적인 문장에도 조건이 필요하다. 참 웃긴 말이지만 단호하고도 담백한 말 속에 은은한 낭만성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단순명료하기만 한 것으론 무언가 부족하다. 그것이 건조하기만 한 진실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날 것의 사실이 주는 불편함을 중화시켜주는 것이 아름다움의 역할일 테니 말이다.
사람이 쓰는 말의 내용이 아닌 형태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그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내면 상태가 어떠한지, 나아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까지도. 반대로 이러한 상황들이 변하면 말하는 방식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언어의 형식을 좋아하고 있느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사람의 윤곽을 대략적으로 그려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윤곽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도 하는 것 같다. 어쩌면 몇 년이 지나 또 다시 낭만적인 시적 어휘를 적어내려 애쓰는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말을 한다는 것은 단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실시간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속으로 지향하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타인에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쁘게 말하는 사람은 내면 또한 그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말은 아름다움 면에서 좋은 것 말고도 다양한 '미'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단순명료한 미, 복잡하면서도 깊은 미, 세심한 미, 유쾌한 미 등등. 저마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따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미'의 기준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말을 진정으로 '예쁘게' 만들어주는 건 자기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 말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