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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Sep 13. 2022

당신에게서 나를 떼어내며

결혼을 마주하는 마음

 

나의 생은 엄마 품에서 시작됐으며 나라는 존재는 우리 집에서 빚어졌다. 엄마 품은 따뜻했고 우리 집은 안락했지만 언제까지고 그 안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익숙한 품을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 서야 하는, 누구나 겪은 발달과업을 나 또한 겪어야 했다.      


엄마 이불 속에서 나와 혼자만의 잠자리에 몸을 누이던 다섯 살의 밤, 의지할 데 없이 소란한 학교로 향하던 여덟 살의 막막한 발걸음.     


다음 학년의 새 학급으로,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으로. 새로운 사회로의 데뷔는 반복되었고, 그곳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어떻게든 덤덤해졌다. 괜찮게 적응하거나, 안 괜찮음에 익숙해지거나.   

  

나 자신을 새로운 사회에 데려다 놓는 것은 나의 의지보다는 사회가 정한 순서였다. 꾸역꾸역 세상이 시키는 곳에 가서 앉아, 엄마 보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눌러가며 마침내 마지막 무대인 직장에까지 올랐다.    

 

취업 후로는 나의 의지로 계속 새로운 곳에 찾아갔다. 각종 동호회와 스터디를 전전하고 때때로 낯선 타지에 나를 내던졌다. 그렇게 해도 아주 괜찮았다. 더 이상 낯선 곳, 새로운 사람들 틈에서도 처음 혼자 학교 가던 날처럼 마음이 황망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아빠에게서 건강하게 정서 분리한, 마음이 튼튼한 인간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아픈 성장은 아직이었다. 지금까지의 것들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든 엄마아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실제로 나는 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결혼을 겪어내는 중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제 완전히 엄마아빠 집에서 분리되어 나가야 한다. 이번에는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만, 나라는 존재를 엄마라는 모체에서 떼어 내보내야만 기나긴 양육에 매듭을 짓는다. 나도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에게서 분리되어 나와야만 온전한 나로서 살아갈 수 있다.     


엄마의 손발로 나의 삼십삼 년이 유지되어 왔구나. 엄마의 부재로 엄마의 존재를 실감한다. 나는 집에 가고 싶고 엄마가 보고 싶은 입학생의 황망함을 다시 겪어야 한다. 얼마나 긴 시일이 걸릴지 몰라도, 나는 마침내 받아들일 것이다. 괜찮게 적응하면서, 안 괜찮음에 익숙해지면서.     


아마 엄마는 평생 보고 싶을 것이다. 엄마 없이도 아주 괜찮은 삶이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허전함과 그리움, 고마움, 미안함 같은 감정이 마음에 덜컥 내려앉아도 아무렇지 않게 웃게 되겠고, 복잡한 마음에 목이 꽉 잠겨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될 것이다.     


외할머니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엄마도, 엄마 보고 싶은 마음 꾹 참고 사십 년을 살았을 것이다. 엄마는 평생 보고 싶을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고, 안 괜찮아져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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