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들. 서운해

부푼 기대에서 시작하여 날카로운 비수로 끝나는 감정.

by 에이블

겉잡을 수 없는 서운함을 돌이켜보면, 잔뜩 기대한 것이 화근이다.


사건의 시작은 지난 달인 9월의 말.

친구가 된지 15년이지만 그 중에 10년은 얼굴도 못보고 지낸 중학교때 친구의 모바일 청첩장을 확인했다.

평소에 연락도 안하다 결혼 할 때 되서야 연락하는 사람에게는 축의금을 내지 않는 것이 내 마음 속 철칙이라

다른 때 같았으면 서울과 부산의 거리를 핑계로 축하인사 정도로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 따라인지, 아님 이 친구가 내 추억속에서 특별해서 인지 문득 결혼식에 가고싶어졌다.

조금 망설이다 결국 부산행 KTX 티켓을 결제했다.

'겸사겸사 집에도 다녀오고, 다른 친구들도 보고 그러면 되지.'

그렇게 시작은 미미했으나, 계획은 창대해졌다.


분명 결혼식이 부산행의 주 목적이었으나, 서운함은 그 창대한 계획 속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왕복 교통비 10만원의 본전은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다 연락을 취했다.

그저 보고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 속에는 '오랜만에 내려가는 것이니 너희는 당연히 날 위해 시간을 낼거야'라는 아주 오만한 기대도 은근슬쩍 들어가 있었다.

물론 연락했을 때 처음부터 깔끔하게 'NO'라고 대답해준 사람에게는 전혀 미련이 없었다.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다면, 내 속에 아무리 오만한 기대가 있다해도 그 정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연락하는 한 명, 두 명, 점차 'NO'가 쌓여갔고, 기대가 실망으로 슬쩍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그 때 흔쾌히 'YES'를 말해준 친구가 있었으니, 그 친구가 내 오만한 기대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을 익히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왜이리 기대를 많이 했는지.


머릿속에는 부산에서의 3박 4일을 그리며 들뜨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그 다음엔 어딜가고, 무엇을 먹을 것이며 등등. 나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신났었다.

아마 반복된 'NO' 속 나를 구원한 'YES'에게서 나의 3박 4일을 빛내줄 한 줄기 빛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신성하리만큼 빛나던 'YES'가 'NO'로 바뀐 건 약속 3일 전인 오늘 아침.

한 달 전부터 토요일로 잡았던 약속을 뜬금없이 일요일 아니냐고 묻는다.

아, 불길했다. 갑자기 한줄기 빛이 엄청 가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토요일이잖아.'

'아... 미안한데 나 안될거 같아...ㅠㅠ'


역시 슬픈 예감은 언제나 적중이다.

갑자기 내 머릿속 찬란한 빛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찬바람만 쌩쌩 불기 시작했다.


'아 뭐야, 한 달 전부터 토요일이라고 했는데...'

'내가 일정을 잘 못 알고 있었더라고. 정말 미안해...'


이렇게 나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알겠어~! 다음에 다시 날 잡고 보자^^'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뭐 너와의 약속 쯤이야 별일 아니었어' 라는 느낌을 글자에 오롯이 담기 위해 애썼다.

이모티콘으로 그 느낌을 최대화하리라, 마음먹으면서 보냈다.

보내고 나니 내 눈에는 글자에서 서운함이 뚝뚝 떨어지는게 보였다.

그 친구는 그 대답에 서린 서운함을 보고도 넘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쿨하게 대화가 끝났다.


'에이, 뭐 처음부터 결혼식이 목적이었으면 거기에 충실해. 뭘 이런거에 연연하고 있어... 너는 뭐 일정이 없냐? 그 친구도 갑자기 바꾸긴 했지만 자기 일정이 있는거지. 그리고 너 지금 그렇게 친구만나고 다닐 때가 아니잖아, 차라리 잘됐어. 약속에 쫓겨다니지말고 여유롭게 쉬다 오자고.'


누가 들어도 자기합리화의 전형적인 멘트다.

거기서 끝나면 되는데, 생각보다 기대가 컸나보다.


'친구 뭐 별거 있어,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고. 다들 자기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난 너무 친구를 좋아하는 거 같아. 나도 나만 생각할거야. 일단 내가 잘 되고 봐야지. 아, 됐어. 나도 바빠. 나도 바쁘다고.'


난 분명 기분이 상했고, 깨져버린 기대의 조각들이 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힌게 틀림없다.

그 친구가 일부러 그랬을 리 없는건 정말 잘 알지만, 그래도 서운함이 흘러넘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냥 다 흘러가버리도록 내버려두는 수 밖에.

그래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마음이 많이 비워졌다.


이런 감정은 참, 누구에게 말하기도 애매하다.

객관적인 눈으로 나를 보면 진짜 못난이 중에 이런 못난이가 없을 것을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적인 공감을 구하기 힘든, 흘러넘쳐 내보내는게 상책인 이 감정을 나는 오늘 여기서 끄적이면서 마저 쏟아내 본다.


그래서 결론은,

지금은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