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에서 노니는 세 벗
세상 밖에서 노니는 세 벗
28. 자상호(子桑戶, 뽕나무 문 선생), 맹자반(孟子反, 맹반대 선생), 자금장(子琴張, 거문고 당기기 선생), 셋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사귐이 없는데서 사귈 수 있고, 서로에게 하지 않는데서 함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누가 하늘에 올라 안개 속을 노닐고, 무극(無極)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서로 삶을 잊어버리고 끝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습니다. 마음에 막히는 것이 없어 결국 모두 벗이 되었습니다.
29. 얼마 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자상호가 죽었습니다.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에 공자가 이 말을 듣고 제자 자공(子貢)을 보내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자공이 가보니] 한 사람은 노래를 짓고 또 한 사람은 거문고를 타면서, 목소리를 합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 상호여. 아, 상호여.
그대 이제 참됨으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 사람으로 있구나. 아.”
자공이 급히 앞으로 나아가 말했습니다.
“감히 물어 보겠습니다. 주검을 앞에 놓고 이렇게 노래 부르는 것이 예(禮)입니까?”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습니다.
“이 이가 어찌 예의 뜻을 안단 말인가?”
30. 자공(子貢)이 돌아가 공자에게 아뢰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까? 바른 행동은 전혀 없고, 자기들의 외모도 잊어버린 채 주검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 나는 세상 안에서 노닐 뿐. 밖과 안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법. 내가 너를 보내 문상하게 했으니, 내 생각이 좁았구나.
31. 그 사람들은 조물자와 함께하여 하늘과 땅의 일기(一氣)에서 노니는 사람들. 그들에게 삶이란 마치 군살이 붙거나 혹이 달린 것과 마찬가지요, 죽음은 부스럼을 없애 버리거나 종기를 터트린 것과 같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어찌 삶과 죽음의 우열을 따지겠는가? 여러 가지 물질을 잠시 빌려 몸을 이루는 것. 간이니 쓸개 같은 것도 잊고, 귀니 눈이니 하는 것도 놓아둔 채, 끝과 시작을 계속 반복할 뿐. 그 시작과 마지막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잊고 티끌과 먼지 밖에서 유유히 다니고, ‘함이 없는(無爲) 함’에 자유로이 노닌다. 이런 사람들이니 어찌 구차스럽게 세속의 예 따위를 따라가면서 뭇사람의 눈에 띄려 하겠는가?”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남긴 공자의 유명한 어구다. 인의예지신 인위적인 예법을 중요하게 여긴 공자는 과연 진정한 도를 알고 있었을까?
문득 앞장에서 언급되었던 ‘도는 터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 는 구절이 떠오른다. 그런데 공자는 ‘도를 들으면’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자는 도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바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도를 터득하기를 바랬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자에게 도는 얼마나 멀리 있었을까? 한편으로는 늘 지나치게(?) 겸손했던 공자의 심성으로 볼 때 도와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슬쩍 떠올려본다. 어쨌든 장자에서 가상으로 등장하는 공자는 도를 모르는 인물로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종종 인품은 괜찮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위의 본문에서 처럼 자신의 실수를 금방 인정하곤 하니 말이다.
본문에서 ‘하지 않는데서 함’ 이라 하였다.
바로 앞장(장자39)에서도 설명했던 무위(無爲)를 뜻하는 말이다.
이 장에서 좀 더 풀어서 세세하게 설명해보면 좋을 듯하다.
무위는 글자 그대로 ‘함 없는 함’ 이라고 한다. 혹은 ‘하는 이 없는 함’ 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참으로 모순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필자의 글 앞편에서 설명한 대로 노장자의 핵심 사상이 무위 자연이라 한다. 자연(自然)이라는 글자를 함께 놓고 보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우리는 흔히 자연이라 하면 풀과 나무와 같은 식물들, 이런저런 동물들, 그 바탕을 이루는 산, 바다, 호수, 공기와 같은 자연물들을 떠올린다. 이런 자연에 대비되는 표현이 인간 혹은 인공(人工)이다. 여기서 자연(自然)이라는 표현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자. 스스로 자(自)에 그럴 연(然)이 된다.
자연의 본래의 근본적인 의미는 ‘스스로 그러하다’ 이다. 세상 만물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알아서 형성되고 알아서 변화하고 알아서 소멸된다. 이 우주와 그 속에 포함된 만물이 다 그렇다. 우주의 모든 공간과 태양계와 지구와 바람과 별이...... 모두가 그랬다. 인간도 그 안에서의 자연의 일부로 생겨났다. 본래는 인간도 자연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런 근본적인 ‘자연’의 의미와 ‘무위’는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니다.
자연을 보라. 한송이 꽃을,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자연이 애쓰는가? 거기에 어떤 행위자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자연스레 꽃 피우고 자연스레 열매 맺는다. 드러난 행위자 없이 일들은 스스로 ‘있는 그대로’ 일어난다. 그래서 자연은 은 있는 그대로 무위이다. 필자가 장자를 통해 강조하고 또 반복해왔듯이 이 모든 바탕에 도(道)가 편재해있다. 그래서 도는 원리이기도 하고 작용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를 도의 작용으로 볼 수도 있고 도의 손발이 되는 기(氣)의 흐름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 본디 하나로서 서로 다르지 않은 - 무위(無爲) 자연(自然)을 거스르는 것이 인위(人爲)이고 인공(人工)이다.
이런 맥락에서 장자가 공자를 가끔은 쪼다(?) 취급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공자는 인위적인 사회규범인 인의예지신을, 그것을 도(道)라 여기는 인의예지신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장자의 스승격인 노자가 이 세 사람(노자, 장자, 공자) 중에서 가장 선대의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노자를 만나서 한 수 배움을 얻고자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자는 장자보다 선대의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유명해졌다(그러니 장자는 공자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잘 들어서 알고 있었을 터다). 그렇기에 노자의 제자격이며 공자의 후대 사람인 장자는 자신의 글에서 가상의 공자를 세워놓고 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의 가르침이 의미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세상 돌아가는 현실을 봤을 때 공자의 인위적인 가르침이라도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혼란스러웠을 것임이 틀림 없다. 도가의 무위 자연의 가르침은 일상적으로 적용하기에 너무나 수준이 높을지도 모른다. 분명 공자의 가르침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보자.
‘그 사람들은 이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 나는 세상 안에서 노닐 뿐. 밖과 안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법. 내가 너를 보내 문상하게 했으니, 내 생각이 좁았구나.’
장자 이야기의 처음부터 반복되는 내용이다. 죽음에 대한 도(道)의 흐름에 따른 태도라고나 할까.
어쩌면 위와 같은 공자의 언변 또한 도(道)를 모르는 것일 수 있다. 세상의 안과 밖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을 것인가? 도는 안과 밖을 나누지 않고 전체에 편재해있는 것인데. 아무튼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즉시 깨닫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공자는 나름의 큰 그릇은 맞는 듯하다.
‘누가 하늘에 올라 안개 속을 노닐고, 무극(無極)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서로 삶을 잊어버리고 끝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태극(太極)이란 우리 국기에서 보아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음과 양으로 나누어져 돌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뜻한다. 음과 양의 상대성을 바탕으로 끝없이 이합집산(離合集散) 되면서 운영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 장자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장자는 세상의 상대성을 초월하여 절대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도(道)와 합일되어 나아가는 길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이런 태극의 상대성을 초월하여 음과 양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가 무극(無極)이다. 그리고 이 무극의 세상이란 붓다가 말씀하신 불사(不死)의 세계, 무엇도 형성되지 않은 태초의 세계, 해탈 이후로 이어지는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세계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자.
도(道)를 통한 사람들은 세상의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에는 종종 자신이 도인입네 하면서 세상의 윤리와 전혀 상관 없는 듯이 지내는 사이비 교주들이 있다는 것이다.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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