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 산다는 것

오랜 역사를 가진 착각

by 김현철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하고 버릇이 없다?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일리아드』에 “고대의 장수들은 혼자서 돌을 뽑아 적에게 던졌지만 요즘 젊은 장수들은 둘이서도 그 돌을 들지 못한다”라고 적었다. 호메로스와 함께 서양문화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서사시인 헤시오도스(Hēsiodos)도 “내가 어릴 때는 조신하게 행동하고 어른들을 공경했으나, 지금의 청년들은 너무 약삭빠르고 참을성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13세기 사제(司祭)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볼로냐 대학의 교수였던 펠라기우스(Pelagius)도 “요즘 학생들은 선생들 위에 서고 싶어 하고, 선생의 가르침에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도전한다”라고 한탄했다. 이른바 ‘요즘 애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평가다.


동아시아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동시대의 다른 제자백가에 비해 냉철한 사고력을 지녔던 한비자(韓非子)마저 “지금의 어리석은 젊은이들은 부모가 화를 내도 고치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꾸짖어도 움직이지 않고, 스승이 가르쳐도 변하지 않는다(今有不才之子, 父母怒之弗爲改 鄕人譙之弗爲動 師長敎之弗爲變. 『韓非子』「五蠹」 편).”라고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때의 기사에도 “요즘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다(竊觀比來, 世降俗末, 士習不古, 숙종 17년 8월 10일)”라는 기록이 보인다. ‘기성세대들의 젊은 세대가 자신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동서에 걸쳐 수 천 년 된 고정관념이 아닌가 싶다. 정말 다음 세대가 기성세대보다 어리석었다면 인류의 역사가 발전할 수 있었을까? 공자(孔子)는 “후배들이란 두려운 것이니, 그들이 지금의 우리만 못하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느냐?(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論語』「子罕」 편)”고 물어 이런 생각에 일침을 놓았다.


우리 시대에도 사회 여러 분야에서 젊은이들을 탓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의 인성을 문제 삼는 현상은 여전하다. 어려서부터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2014년에는 세계 최초로 인성교육을 의무로 규정한 법안까지 제정했다. 세계 최초라고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이런 법을 제정해야만 했던 저간(這間)의 오판에 대해 어른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 우리 젊은이들의 인성이 문제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건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논어』 「공야장(公冶長)」 편에는 공자가 자천(子賤)을 칭찬하면서 “만약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더라면 이 사람이 누구에게 이런 덕을 배웠겠냐(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자천의 주변에 덕이 있는 군자들이 많았기에 그들에게서 보고 배웠을 것이란 뜻이다. 공자의 생각을 빌려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문제 있는(!) 인성은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그리고 그게 법으로 해결이 될까?



진정한 어른으로 살아가려면


과거에 비해 개인의 인권과 표현의 자유가 대폭 신장되면서 우리 삶을 억압하던 요소들이 사라져 보다 자유롭게 개인의 가치를 실현하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이면에서 의도치 않은 부작용도 생겨났다(인간의 삶 어디에서도 이 부작용은 어쩔 수 없다. 좋은 요소와 그렇지 못한 요소는 언제나 한 쌍으로 존재한다). 사회구성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신의 허물은 돌아보지 않고 타인을 탓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어쩌면 이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관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렇기에 기독교 성경에서도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듣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오복음)”고 말하고, 한비자도 “인간의 지혜(생각)란 눈과 같아서 백 걸음 밖을 보면서도, 자기 눈썹은 보지 못한다(智之如目也, 能見百步之外, 而不能自見其睫, 「喩老」 편)”고 근심했다. 역시 인간은 자신의 큰 허물은 못 보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은 잘 본다. 어쩌면 이런 관성은 인간의 보편적 속성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경험이 짧은 젊은이라면 이 관성에 떠밀려 살아가도 큰 허물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삶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며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던 사람이 이런 관성에 떠밀려 살아간다면 좀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을 돌아보지는 못하고 남의 탓만 하며 살아간다면 어른스럽다고 말하기 어렵다. 진정한 어른이라면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킬 시간이 부족했던 젊은이와는 달라야 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탓하는 전에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하고, 젊은이들보다 더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허물에는 엄격하지만 타인의 과오에는 관대할 수 있어야 하지 아닐까?


우리는 과거에 비해 더 풍요로워졌지만 갈등은 더 심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사회를 풍요로 이끌어온 공(功)도 그렇듯이, 갈등이라는 과(過)에 대한 책임 역시 젊은이들보다는 어른에게 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른이 먼저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탓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삶을 보고 배웠을 터인데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진정한 어른으로서 삶은 어떤 것일까?



1. 어디에서든 조화[龢]를 이루어 낸다


나이는 들었으나 어른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이들의 결정적 과오는 “자신은 옳은 데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확신이다. 이것은 독선(獨善)이고 착각이다. 마음의 그릇이 작아서 다른 생각을 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그 모습만큼이나 생각도 다양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양하다. 각자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것도 다양하다. 우리가 정치제도로 선택한 민주주의는 이 다양성(diversity)을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대하다. 타인이 자신의 방식대로만 생각하고, 자신의 방식대로만 판단하고, 자신의 방식대로만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민주 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질이 부족한 셈이다. 민주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사라져야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마저 있다. 그야말로 민주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치관이 아닐 수 없다.


직장에서의 리더와 구성원 간 갈등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높은 직위에 있거나 권한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아랫사람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리더들이 여전히 많다. 구성원 각자가 가진 기량을 발휘하는 것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조직이 리더에게 부여한 임무, 즉 구성원들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서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기본적인 책무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리더는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살려 자신의 방식대로 일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기업에서는 이미 이렇게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삼성전자 경계현 사장은 리더의 역할이 ‘직원 모두의 가슴속에 있는 진주(재능)를 꺼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여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일할 수 있도록 조직문화를 바꾸고 정착시킨다. 그 결과로 조직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낸다. 세계적인 리더십 전문가인 리즈 와이즈먼(Liz Wiseman)은 이런 리더를 자신의 책 『멀티플라이어:어떻게 사람들의 역량을 최고로 끌어내는가』에서 ‘멀티플라이어(Multiplier)’라고 규정했다. 구성원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는 데 집중하면서 구성원의 역량을 감퇴시키는 리더인 디미니셔(Diminisher, 이들은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하는 데 몰두한다고 말한다)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 구성원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리더로서의 미션을 달성하는 데 집중하는 대신 이른바 구성원의 ‘버르장머리’에 집착하거나 ‘기강’을 잡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조직의 역량을 감퇴시키는 디미니셔가 의외로 많다. 어쩌다 높은 직위에 이르렀지만 리더로서의 역량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어른의 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뛰어난 리더나 진정한 어른은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며 타인을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용하여 조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한자 중에 ‘풍류 소리가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화(龢)란 글자가 있다. 어디에서나 이 조화[龢]를 이루어 내는 사람이 어른이다. 뛰어난 지휘자는 모든 악기들이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소리를 내면서도 조화를 이루게 한다. 진정한 어른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면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갈등하거나 반목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당신의 악기는 음역이 너무 높아서 거슬리니 낮은 음역으로 연주하라’고 하는 지휘자가 있다면 어떨까?


획일화되지 않고 서로의 개성을 발휘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삶, 이게 공자가 부르짖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 시대에 실현한 모습이 아닐까? ‘자신만이 정의롭다는 확신’을 갖고 자기의 신념을 소리 높여 외쳐 조화를 깨뜨리고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미숙한 어른에 불과하다. 몸의 나이를 마음의 나이가 따라가지 못한 미숙한 어른은 자신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기는 어렵다.



2. 먼저 자신을 변화시킨다


세계적인 화학회사 듀퐁(Dupont)의 엔지니어였던 빌 고어(Bill Gore)가 관료적 조직문화를 벗어나 민주적 조직문화와 창의성으로 운영되는 조직을 구현하고자 설립한 회사가 고어텍스(Goretex) 사다. ‘Gore & Associates(고어와 그의 동료들)’란 독특한 회사 이름이 그의 생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등산복 소재로 유명한 고어텍스를 비롯해 소재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조직의 창의적이고 민주적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주식시장에 상장(上場)도 하지 않고 있다. 회사의 CEO도 구성원들의 지지에 따라 결정된다. 평사원으로 출발해 2005년 CEO에 취임하여 10 여 년간 고어텍스의 혁신을 이끌었던 테리 켈리(Terry Kelly)는 “그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유능해서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구성원들은 ‘당신이 없으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인간의 심리적 경향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 명언이다.


나이나 직위를 내세우며 타인을 먼저 바로잡으려는 태도는 대부분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미흡한 기량에서 비롯된다. 이럴 경우에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기는커녕 “너나 잘하세요”라는 반응을 불러오기 쉽다. 설령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직장 상사라 하더라도 구성원이 결코 진심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 법의 허점과 편법, 탈법을 동원하여 경영권을 승계한(승계받은 이가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기도 했다) 모 그룹의 회장이 외국 출장에서 귀국하면서 “우리 국민들이 좀 더 정직해야 한다”라고 말해서 많은 이들을 경악케 한 적이 있다(그렇게 역량이 출중한 경영자라 할지라도 타인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신의 잘못을 보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혹은 타인에 잘못에는 엄격하고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거나). “자신이 먼저 변화하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수 천 년 동안 수없이 증명된 가설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뛰어난 리더치고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는 일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것에 실패하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겼어도 뛰어난 리더라고 평가받지 못한다.


자신의 선한 의도대로 타인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는 오로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적응하지 못하면 금세 알아채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라며 볼멘소리를 하기 마련이다. 생각해 보라. 공무원이나 서비스업 종사자가 10년, 20년 전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문제는 자신이다. 자신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좀처럼 눈치를 채지 못한다.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하고, 이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이것이 어른다운 판단이다.



3. 공부(工夫)를 놓지 않는다


성인(聖人)이 아니면 해내기 힘든 어려운 일 같지만 희망은 있다.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 모두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리더, 좋은 부모, 좋은 동료, 그리고 좋은 사회구성원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이런 좋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조금만 힘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바로잡는 데 집중하기 쉽다.


동아시아인들의 오랜 설명에 따르면 원래 깨끗했던 본래의 마음(이를 (本)性, 眞如 등 여러 가지로 부른다. 이 인간 내부의 초월성에 희망이 있다)이 흐려져서 그렇다. 마치 깨끗한 유리창이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듯이. 어떻게 할 것인가? 동아시아인들은 닦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곧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온다. 바로 이것이 공부(工夫)다. 그래서 맹자는 “공부란 다른 것이 없다. 자기가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에 불과하다(學問之道 無也. 求其放心而已矣).”라고 강조했다.


진정한 공부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새로 머릿속에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뛰어난 인재로 여겼던 이들이 중요한 직위에 올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개인과 자기 집단의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공부가 덜 되어서 그렇다. 어디 그들이 어떤 게 고위 공직자나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바람직한 자세인 줄 몰라서 그럴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공부(工夫)는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다리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명료하게 깨닫고(머리), 그 아는 것에 비추어 타인의 삶에 공감하며(가슴), 좋은 삶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다리). 아는 것이 머리에 머물러 있으면 옳고 그른 것을 인간의 조화로운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경험한 것, 혹은 내가 지지하는 정파의 입장으로 판단한다. 장자는 이것을 우물 안 개구리[정저지와(井底之蛙)]라고 표현했다. 깊이 파고 들어가 있으니 넓게 조망할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기여하는 길은 (겨우 자신의 삶의 시간과 공간에서 얻어진) 자신의 편협한 가치관으로 타인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려 덤비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시도는 공부가 머리에 머물러서 그렇다.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냉철한 평가를 받기보다는 응원받고 지지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타인도 나의 응원과 지지를 염원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공부가 가슴에 이른 것이다. 진지하게 가슴으로 느낀 후에야 인간 욕구의 정점인 자아실현, 즉 타인과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실천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공부가 다리에 이른 것이다. 우리 지역사회에도 이런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다. 학력과 공부의 이력과 상관없이 묵묵히 타인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이다. 진정한 공부를 이루고 자신의 삶을 통해 타인을 이롭게 하는 분들이다.


이 실천의 공부를 멈출 때 인간은 교만에 빠진다.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고 타인을 비판하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이 땅의 선비들은 ‘관인엄기(寬人嚴己)’라는 글자를 걸어놓고 타인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해지려는 자신을 경계했다. ‘엄인관기(嚴人寬己)’의 강력한 자기장(磁氣場)이 우리에게 힘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은 잔소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40년을 선생으로 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후배들을 이끌어오는 동안 수많은 과오를 반복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타인을 가르치거나 이끌어가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면 모두가 바르게 행동하고, 자신이 잘못을 고치면 모두가 고친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 꼭 가르쳐주고 싶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먼저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면서 그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가르치려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가 배우게 된다. 이게 어른에게 주어진 숙명이 아닌가 싶다.


논어에도 말은 뒤로 미루고 먼저 실천하라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온다. ‘말은 나중에 하고, 먼저 실천해라(訥於言而敏於行)’. ‘먼저 자신의 말을 실행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따른다(先行其言 而後從之)’. 뛰어난 리더는 자신의 말이 행동을 넘어서는 것을 부끄러워한다(君子 恥其言而過其行).


데시(Edward Deci)와 라이언(Richard Ryan)이라는 두 심리학자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세 가지 동인을 밝혀냈다. 그중 하나가 효능감, 혹은 유능감이다. ‘자신이 잘 해내고 있다고 느껴야’ 행복한 것이다. 어른으로서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갈 때 효능감을 느끼고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은 결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단순한 지침이 있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른으로 대접받으려 하지 말고 어른 노릇을 해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성숙한 어른은 자신의 나이나 직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한결같이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식견에 자만하고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타인을 평가, 비판하는 대신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타인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응원하고, 지지한다. 이 노력이 계속될 때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고 존경한다. 그를 보며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갖는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으로 인해 위로를 받고 희망을 품는다면 이 얼마나 어른의 품격에 어울리는 삶인가?


맹자(孟子)는 제선왕(齊宣王)이 자신이 강조한 왕도정치를 ‘못하는 것[不能]’이 아니라 ‘안 하는 것[不爲]’이라고 강조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악, 시비(是非)를 가릴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사회의 많은 어른들이 어른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않는 것’은 아닐까? 다음 세대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어른으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고,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혹시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생각만 바꾸면 되지 않을까? 어쩌면 어른에게는 남을 비판하고 시비를 가리고 버르장머리를 바로잡을 시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덕을 베풀기에도 짧은 시간만 남아있을지 어찌 알 수 있으랴?


설령 썩 흡족한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는 후회가 있어도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논어에는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말이 실려있다. “어른의 잘못은 일식, 월식과 같다. 잘못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본다. 잘못을 고치면 모두가 그를 우러러본다(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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