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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 Dec 17. 2023

송년음악회에서 잠든 아들에게 사과합니다

엄마도 힘들었어

나 클래식 좀 듣는 여자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AI스피커에게 말한다. 크로버 클래식 틀어줘. 아이가 문제집을 풀거나 책을 읽을 때는 특별히 피아노 클래식으로 주문을 한다. 하루 종일 클래식이 흐르는 집에서 생활하지만 사실 듣는 클래식에 마음이 편할 뿐, 클래식의 C자도 모르는 이과 언니이자 직장에서도 매일 건반 대신 키보드를 두드리며 데이터 분석을 하던 여자다. 현재는 초1 아들을 기르며 BTS의 덕질에 반은 미쳐 지내는 노란 염색머리의 40대 아줌마다.

아마 100이면 100, 내 지인들은 나와 클래식을 연결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의 명함을 가지고 있던 시절, 출퇴근 운전길 친구는 93.1 클래식 FM이었고, 결혼하고 고이 모셔온 시디는 클래식세트였다. 집에 있던 1,000여 장의 시디 중 클래식세트 30장만 챙겨 온 걸 보면 어지간히 아끼기도 했지만 그냥 꼭 챙겨 오고 싶었다.

아이를 임신하고 태교를 위해서, 출산 후에도 습관적으로 아침마다 라디오 클래식 FM을 틀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라디오 대신 뽀로로와 핑크퐁이 동시 다발적으로 이 장난감, 저 장난감에서 나오고 클래식 대신 어깨춤이 절로 나는 트니트니가 만나서 반갑다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신랑이 사 온 AI기기 크로버에서는 연신 쉬지도 않고 자동차 시리즈의 노래, 세상 공룡 다 나오는 노래, ABC까지 알려주는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클래식을 잊고 살았다.

결혼한 나를 따라온 클래식시디세트

피아노를 10년간 쳤지만 체르니 30을 넘어가지 못했고, 엘리제를 위하여 도입부의 건반 10개도 못 치는, 피아노 거부감이 큰 엄마이기에 피아노를 시작한 초1 아이에게 피아노에 대한 친밀감을 쌓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크로버에게 클래식을 주문하고, KBS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로 라흐마니노프 공연을 데려갔으니, 이 모든 건 아이를 위한 엄마의 큰 그림이었다.

처음 보는 다양한 악기들과 웅장한 소리에 몸을 베베꼬고 힘들어할지언정 1부와 2부를 잘 버티고 나왔기에, 얼마 후 반 친구와 베토벤 황제를 관람하게 되었다. 처음 공연과는 달리, 황제를 자장가 삼아 시작 10분 만에 꿀잠에 들었으니 의외로 혼자 맘 편히 관람하고 아쉽게 2부는 영접하지 못하고 나왔다. 그리고 석촌호수를 뛰어다니는 두 놈을 따라 어색하게 아들 친구 엄마와 하하 호호 걸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함께 가자 말한 죄인인 내가 커피 쐈다.


포기를 모르는 엄마는 이번에는 오르간이라는 신기한 악기를 보러 가자며, 이미 2번의 힘든 경험을 알기에 유치원 시절 첫사랑이자 첫 청혼자였던 친구와 함께 예매를 하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못 오게 되었고 불만이 배가 된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들어갔는데, 유레카! 연주와 해설을 함께 하 호기심 많고 지식이 무기인 아이에게 딱인 맞춤형 공연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서 노래를 부르는 클래식 공연도 있다며 송년음악회 베토벤 합창을 예매하였다.

송년음악회와 같은 날 오전에 롯데 콘서트홀 스테이지 투어를 예매해서 저녁 송년음악회를 더 집중시키려 했지만 관람 후 그냥 그랬다며 속 터지는 소리는 안 비밀이다.


드디어 신랑까지 세 가족 완전체로 송년음악회를 보러 가게 되었으니 제일 설렌 건 나였다. 초등학교 6학년 첫사랑이었던 학원 선생님이 송년음악회 합창을 다녀와서 그 긴 팔을 휘저으며 이야기해 주던 설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쁜 마음으로 들어간 콘서트홀에서 결국 아들은 1부 중간에 아빠와 나가버리고 인터미션에서 2부는 잘 보기로 약속하고 들어왔으나 나란히 잠든 두 남자를 보는 순간 그래, 그냥 내년부터는 표 3장 값으로 좋은 표 1장 구해서 혼자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꿀잠 잔 송년음악회 베토벤 합창 (좌), 유레카! 오르간 오딧세이 (우)




조선미의 현실 육아 상담소 말미에서 조선미 박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들이 대부분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내 삶에서 내가 뭘 원하고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내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서 부모인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게 맞아.'
(조선미의 현실 육아 상담소 P. 267~268)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내가 아이를 위해서 하는 일들이 진정 아이가 원하고 아이의 행복을 위한 일일까? 이 질문을 내 상황에 대입해 보자.

클래식이 흐르는 집과 클래식 공연은 정말 아이를 위한 큰 그림이었을까?

이 책을 읽은 지금 내린 결론은 내 선택은 아이를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는 확인사살이다.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아이는 처음 공연을 경험한 후 2시간 이상을 버텼다며 대단하고 멋지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그로 인해 자존감이나 행복감이 올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다는 아이를 우쭈쭈 하기 위해 과한 칭찬을 남발했다.

다양한 클래식을 접해주고 싶은 엄마의 의도는 좋았으나 과연 그게 지금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적절했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다. 해야 했다면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한 나이이다.

게다가 자연스럽지도 않았다. 아이는 가고 싶어서 따라간 게 아니라 엄마 손에 끌려간 게 맞았다. 클래식 공연장을 지키며 몸을 베베꼬고, 헤드뱅잉을 하며 꿀잠을 자는 대신 석촌 호수를 마음껏 뛰어노는 게 더 즐겁고 행복한, 아이가 원하는 것이었다.


조선미의 현실 육아 상담소 추천합니다!

조선미 박사님은 우리를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위로하며 방법을 말한다.

기운을 충전하기 위해 부모 자신만을 위한 계획을 세워보세요.
(조선미의 현실 육아 상담소 P.270)
나 혼자 공연을 보았다면 좋았겠다

송년음악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아이와 함께한 공연들은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이어서 기꺼이 했다지만, 사실은 내가 가고 싶었던 공연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온전히 공연들을 즐기지 못했다. 계속 움직이고 질문하는 아이의 몸단속, 입단속을 해야 했고, 직원의 제재를 받을 때면 부끄러움과 불편함이 혼재했다. '아이가 궁금하니까 물어볼 수도 있지. 하지만 여기 온 사람들은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러 온 게 아니야. 아직 목소리 조절이 잘 안 되는데 끝나고 물어보면 안 되나? 그렇다고 궁금해하는 거를 대답 안 해줄 수는 없잖아.' 등등 오만가지 생각에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공연 중 아이가 잠든 후, 신랑과 나간 후에서야 비로소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그제야 마에스트로의 손짓과 몸짓을 오롯이 보았고, 악기들의 조화를 느낄 수 있었다. 아 돈 아까워!




결국은 불필요한 시간과 돈을 쓰긴 했지만, 그래도 얻은 것이 있으니 마냥 아깝지만은 않다.

아니, 조선미의 현실 육아 상담소를 읽고 나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경험이었다.


1. 아이가 원하기 전에는 나 혼자 공연 갈 거다. 신랑과도 안 가고 좋은 자리 표 끊어서 혼자 간다!

2. 송년음악회 다음날 아이가 크로바 베토벤 황제 틀어줘라고 주문했으니 클래식 듣는 일상은 적응된 듯하다.

3. 아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은 같지 않다. 아이와 내가 다른 사람이듯이.


그나저나 이미 예매한 다음 주 오르간 오딧세이와 내년 신년음악회 빈소년합창단까지만 같이 가자.

미안해 아들 딱 두 번만 더 끌려가줘. 언젠가는 자발적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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