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자가 곧 주인공이 되는 시간, 당신을 박윤영의 만찬에 초대합니다.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한다고요?"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라니. 미술관은 조용하고 정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가 낯설게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 속에서 퍼포먼스는 자연스럽고, 때로는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일상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대중들은 익숙하지 않을 수 있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박윤영의 개인전에서 경험한 ‘퍼포먼스’에 참여하여 필자가 경험하고 느낀 바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박윤영의 개인전을 살펴보기에 앞서, 잠시 퍼포먼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합시다.
퍼포먼스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현대 미술* 이전의 미술에서는 작가-작품-관람자의 경계가 매우 뚜렷했습니다. '천재적인' 작가는 '고귀한' 작품을 생산하고, 그 ‘고귀한’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된다면, 관람자들은 한 걸음 뒤에서 작품을 ‘눈으로만’ 감상합니다. 이러한 작가-작품-관객의 관계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국내 권위 있는 미술관들은 작품과의 경계선을 뚜렷하게 설정하거나 촬영을 불허하는 등의 관습을 당연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술과 관객들의 간극은 선명했고 또 멀었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자 현대미술의 외연은 퍼포먼스까지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해프닝, 플럭서스, 신체 예술 등의 예술운동들은 퍼포먼스를 통하여 기존의 권위에 의문을 품고 균열을 가하기 시작하며, 퍼포먼스가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남준’이 이 시기 미술사적인 변화를 이끈 핵심 인물입니다.) 퍼포먼스 이전 예술에서 작품-관객의 관계가 정적이고 일방향 적었다면, 퍼포먼스 이후의 예술은 동적이고, 쌍방향적이며 참여적인 예술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미술에서 대중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자, 고고하게 전시되기 일쑤였던 작품들은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작가들은 관객들과의 협업을 통하여만 완성이 되는 작품들을 구상하기 시도합니다. 어떤 작품들은 관객들이 그 작품의 존재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관람자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9년 만에 국내에서 신작을 선보이는 박윤영의 개인전 1층에서 만날 수 있는 퍼포먼스가 꼭 그러합니다.
참여자가 곧 주인공이자 예술가가 되는 박윤영의 퍼포먼스
박윤영의 퍼포먼스 <당신의 만찬(Your Supper)>(2019)은 관객들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작품입니다. 관객들이 곧 주인공이고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30분 간격으로 시작되는 퍼포먼스는 한 타임에 12명까지 입장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평일 늦은 점심시간에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필자를 포함한 총 여섯 명의 참여자들이 퍼포먼스에 참여했습니다. 여섯 명의 참여자들은 각각 퍼포먼스를 완성하는 예술가들이 되었고, 각기 다른 여섯 명의 상호작용은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없을 퍼포먼스를 만들어 냈습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참여자들은 무선 헤드셋을 착용합니다. 그리고 정시가 되면, 커튼은 걷힙니다. 참여자들은 커튼 안쪽에 있는 준비된 무대로 걸어 들어갑니다. 참여자들이 무대를 거닐다 보면 헤드셋을 통해 몇 가지 ‘개인적이고 소소한 질문’이 들려옵니다. ‘오렌지와 바나나 중 어떤 과일을 좋아하나요.’ 혹은 ‘사람들을 만날 땐 주로 커피를 마시나요, 차를 마시나요’, ‘만약 당신이 하나 남은 장난감을 구매하려고 할 때, 옆에 있던 아이가 그 장난감을 사고 싶다고 엄마에게 떼를 쓰기 시작한다면, 양보해줄 것인가요.’ 이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질문들 말입니다.
참여자들은 박수를 치거나 걷거나 혹은 자리에 가만히 서는 행위 등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집니다. 낯선 상황에서 낯선 이들 앞에서 홀로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전시를 다니는 필자였지만, 필자 역시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느꼈던 어색함도 잠시, 참여자들은 곧 헤드셋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들의 경험과 기호에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박윤영의 퍼포먼스에서 몸을 움직이는 행위는 곧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각각의 참여자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동시에 타인의 존재를 조금씩 알아갑니다. 처음 느꼈던 긴장과 경계는 점차 사그라들고, 혹시라도 눈을 마주치면 서로 웃어주게 됩니다.
퍼포먼스는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실은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고요.
개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끝난 뒤, 만찬에 초대받은 참여자들은 여러 가지 사물들이 즐비한 테이블을 한 바퀴 돌게 됩니다. 테이블 위에는 과일, 운동화, 장난감, 약, 전자제품 등. 우리의 일상을 영위하며 자주 만나게 되는 사물들이 놓여있습니다. 만찬 테이블을 구경하던 중, 헤드셋 속 목소리는 잠시 영상 하나를 감상하기를 요청합니다. 전시장 앞면과 전시장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제3세계 노동자들의 모습과 서구의 광고 모델들의 영상이 교차적으로 재생됩니다.
퍼포먼스 중에 던져진 질문들과, 만찬에서 만난 사물들은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퍼포먼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코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영상에 잠시 집중하다 보면, ‘개인적’이라고 여겼던 일상이, 결코 ‘개인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을 읽어내는 감각이 살아납니다. 영상은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 지구적인 연결 없이는 탄생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참여자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은 구조적인 모순과 희생, 착취를 거쳐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미술관에 덩그러니 남겨진 퍼포먼스의 구성원들은 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퍼포먼스가 끝나갈 무렵, 목소리는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곧,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우리가 강하다는 증거”라는 말을 남기며 사그라듭니다.
박윤영의 개인전에서 만날 수 있는 퍼포먼스는, 참여자가 곧 예술가가 되고, 경험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 속에서 참여자들은 아주 부드러운 방식으로 동시대적 문제를 사유하도록 장려됩니다. 물론 윤리성이 짙은 작품이 곧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박윤영의 개인전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동시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닙니다.
1층에서 퍼포먼스를 다 관람한 뒤 2층으로 향하면 박윤영 작가의 <12개의 문고리: Twelve-Door Handles>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12개의 문고리: Twelve-Door>는 작가가 독일과 일본에서 발생한 대규모 원전 사고나 영국의 리비아 침공과 같은 동시대 사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이미지와 텍스트들을 개인적인 경험과 뒤섞어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작품들은 드로잉과 조각, 비디오, 사운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재현되었습니다.
1층 퍼포먼스에 참여한 뒤, 2층 전시까지 함께 즐기고 돌아오시면 더 좋을 듯합니다. 쌀쌀한 날씨, 광화문 한복판에 자리 잡은 박윤영의 작품들을 만나보고, 퍼포먼스에도 참여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
*현대미술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볼 것인가는 여전히 논쟁적인 문제입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그 기준을 '뒤샹'과 '다다'로 설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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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참조
일민미술관: http://ilmin.org
김달진 미술연구소: http://www.daljin.com/blog/17397
작가 정미
학부때는 심리학과 미술사를, 대학원에서는 예술학을 전공했습니다. 요즘 전시를 보고 듣고 씁니다. 동시대 예술 플랫폼 아트렉처(Artlecture)의 작가로도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