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의 무기는 무엇일까?

ddp 개관 특집 토크,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교집합과 차집합"

by 희희

2024년 11월 30일, ddp 개관 특집 토크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교집합과 차집합'에 다녀왔다. 최성민 선생님의 강의는 꼭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 자려다가 우연히 신청했는데 들으러 오라는 문자가 반가웠다. 게으름뱅이가 오랜만에 큰 용기를 내서 부지런하게 다녀왔다.

최성민, 최슬기의 슬기와 민의 강연과 신해옥, 신동혁의 신신의 강연 2개로 이루어졌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깜짝 놀랐다. 학교에서 컨퍼런스를 진행할 때 이런 인기를 본 적이 있었나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저변이 단단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팀의 디자인 듀오가 자신들의 작업의 맥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형식의 강연이었다. 이들의 작업을 멀리서 늘 보고 배우는 입장에서 한 번에 두 팀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짧은 시간이지만 밀도 있게 들을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Words don't come easy 슬기와 민

슬기와 민의 토크 제목이다. 글자를 주로 표현의 도구로 쓰고 있는 디자인 팀으로서 글자를 대하는 생각의 관점과 글자, 내용, 이미지의 관계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처음 슬기와 민의 전시를 갔던 것은 2017년 페이지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이었다. 대학원에서 같이 관람을 갔었는데 다들 전시가 난해하다고 말하면서 전시장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도 설명도 없던 전시라 다들 충격을 받았지만 슬기와 민인데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었겠지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그때 이후로 슬기와 민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적어도 나에게는 개념적, 실험적 이런 무거운 이미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 강연에서 나는 그때 생각이 틀렸다고 느꼈다. 슬기와 민은 가볍고 웃기고, 짓궂은 팀이었다. 무겁고 엄숙하고 어렵다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디자인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드는 무서움처럼 디자인을 할 때도 이래도 되나 싶을 때 드는 걱정과 두려움이 있다. 슬기와 민의 작업의 원천은 그런 두려움보다는 주제에 대해서 서슴지 않고 질문하고 해 보는 게 아닐까?


슬기와 민은 토크 말미에 '디자인이 부연 설명 없이 커뮤니케이션되어야 한다.'라는 관습적인 생각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실제로 설명을 듣고 보니 오랫동안 보아온 작업이지만 디자이너의 의도와 내부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니 또 다른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닌 결과물을 부연 설명만으로 살려보려는 시도는 별로지만, 디자인 결과물이 시각적인 인상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가치를 내포하는 것이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 디자인계가 주목해야 한다는 점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디자이너의 의도를 설명할 기회와 계기, 또 그러한 디자이너의 의도와 결과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는 문화가 생겨나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들었다.


글자를 표현의 주된 도구로 쓰는 디자이너들은 문자를 하나의 이미지로 쓸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이미지가 된 글자'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했다. 이는 나도 수업시간에 종종 언급했던 이야기인데 내가 혼자서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다들 쓰는구나 생각했다. 문자가 이미지가 되어 읽히면서도 동시에 보이는 대상이 되면 그것이 갖는 힘이 커진다.

©️슬기와민

이미지가 된 글자 중에 말의 내용과 이미지가 일치하는 경우에는 <배추생각> 포스터 작업의 예처럼 글자가 켜켜이 층을 가진 배추와 유사하게 생기는 경우에 느끼는 명쾌함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이력서> 전시처럼 내용과 이력서의 글자가 이미지가 되어 일치하는 경우 쉽고 조금은 뻔한 커뮤니케이션일 수 있지만 가장 많이 소장된 포스터라는 이야기도 공감이 갔다. 뻔한 아디이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뻔한 아이디어를 정성스럽게 만드는 용기와 기백도 필요하다.

©️슬기와민

'이미지와 갈등하는 말'은 이미지와 말이 미묘하게 불일치하거나 엉뚱한 이미지가 들어있음으로 인해 말이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되는 경우다. 26개 팀의 디자이너를 이미지가 연결되는 프로레슬러 이미지와 자의적으로 매칭시킨 <ON POSTERS> 포스터는 이러한 재미를 보여준다.

또한 이미지가 아예 없어서 말이 엉뚱하게 들리는 경우도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자기소개> 포스터 같은 경우가 그랬다. 자기소개 포스터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따라, 당시 이런저런 강연에서 표준인사말로 사용하던(만화주인공 두 명이 손을 맞잡고 춤추며 빙글빙글 도는 동영상을 배경으로 한) 농담을 포스터에 그대로 옮겼던 예시다. 아이디어가 가지는 힘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축적된 확신을 갖는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슬기와민3.png ©️슬기와민

또한 기능적인 이유가 있지만 대중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의도가 전혀 없는 음료수병 바닥 등에서 표기된 타이포를 이용한 작업도 재미있었다. <크리스찬 디올 향수 포장의 기능적 타이포그래피>에서 보이는 질서와 구조는 있으나 전혀 소통되지 않는 글자들이 주는 인상을 활용한 부분이 좋았다.

또한 아무 말도 안 하는 작업도 또 다른 맥락으로 시각적인 충격과 경험을 준다. <우리의 공공디자인 선언문>에 관하여 "공공디자인 관련 전시회에 포스터를 출품 요청을 받고 공공 디자인에 관심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애초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공공 디자인에 관심 없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어려워지므로, 우리는 적극적 무관심을 알리는 표지 또는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표지를 출품한다."라고 설명한 패기가 부러웠다.


화원, 신신


신신은 신해옥과 신동혁이 함께하는 스튜디오로 이미지를 재료로 치환할 때 이미지가 가지는 물성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을 분명한 아이덴티티의 디자인으로 만들어내는 스튜디오이다. 신신은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매우 실험적이고 표현적이면서도 날 선 아이디어로 자신들만의 언어와 영역을 구축한다는 인상을 준다. 신신을 실제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두 분의 인터부에서 봤던 개성이 강한 이미지보다는 차분하고 내성적이지만 매우 단단한 사람의 아우라를 느꼈다. 동년배가 활발하게 파닥파닥 하게 활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로 자극이 되고 신나는 일이다.

신신2.jpg ©️신신

<참참참> 전시는 이전에 작업한 인쇄용 포스터들을 콜라주로 활용한 전시이다. 마침 전시공간이 가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해서 이전에 디자인된 (쓸모를 다한) 포스터를 재료로 활용하여 이를 자르고 분해하고 재조합하고 연결해서 새로운 맥락을 더한 작업이다. 흰 부분, 파란 부분 등 다양한 포스터에서 잘린 요소들이 무작위 하지만 어떠한 조형적인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부분이 흥미롭다.

신신00.jpg

종이 포스터의 쇠락에 관하여 안타까움, 회의감, 위기의식 등을 통해서 매체에 관한 질문들에 관하여 답을 찾아가는 방식의 아이디어를 모은 전시를 이야기했다. 포스터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시도들이 흥미로웠다. 포스터가 종이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으로 PET원단을 사용해서 물리적으로는 막히지만 시각적으로 뚫린 현상을 활용해서 유리에 부착하고 사진을 2도 실크스크린으로 만드는 포스터와 포스터를 천으로 만들어서 다양한 형태로 걸어둔 사진을 3가지로 담은 포스터, 깃발 포스터의 휘날리는 모습의 스틸샷을 활용한 포스터, 머쳔다이즈를 입는 포스터로 해석한 작업 등등을 선보였다. 이러한 고민은 그래픽디자이너로서 많은 이들이 하는 고민이라 공감이 갔고 이를 신신다운 고민해결방식으로 풀어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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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의 LP 디자인 시안들을 본 것도 재미있었다. 결과물의 톤과는 다른 제법 과감한 디자인이었는데 주인공 해준과 서래를 가 서로 섞이고 이어지는 것 같은 일러스트레이션과 영화에 나왔던 소재들을 콜라주 해서 보드에 픽업한 것처럼 연출한 이미지가 재미있었다. 헤어진 결심의 레터링을 영화족에서 서래가 쓴 글씨처럼 레터링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세종문화회관 아이덴티티 작업과 이를 개인프로젝트로 발전시켜 타이핑할 때 소리 나는 웹폰트로 개발한 프로젝트 등을 소개했다.


두 그래픽 디자인 그룹 모두 문화계의 현상들의 인상을 만들어내는 그래픽디자이너들이다. 그래픽디자이너의 저마다의 무기를 가지고 자신이 만들어가고자 하는 디자인적 실험과 대상의 내용이 서로 부딪히고 융합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제각기의 그래픽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명된 디자인은 훨씬 흥미로웠고, 또 그래픽디자이너들에게는 생각할 거리와 앞으로 도전할 부분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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