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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트리 Mar 11. 2020

나의 누드 모멘텀

마흔 특집 에세이

수증기로 뿌옇게 가려진 거울을 뽀드득 닦으면 내 얼굴이 보인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여기서 마주하는 나는 괜히 새롭다. 125번 락커에 옷을 되는대로 접어 넣고 빨간 열쇠 팔찌를 손목에 차고 ‘당기세요’와 ‘미세요’가 더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의자와 크고 작은 대야를 하나씩 집어 다른 나체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는다. 샤워로 성에 차지 않는 날, 나는 목욕탕에 온다.


나는 지금 목욕을 하는 중이다. 거품이 칠해지는 내 몸을 찬찬히 살핀다. 부지런히 풀어주기를 포기한 승모근은 더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다. 가슴은 오만했던 로마인의 슬픈 토르소를 보는 것 같다. 단단했던 코어는 흐물흐물해졌고 묵직한 허벅지는 시야를 새삼 빈틈없이 채운다. 발가락은 어디 보자. 새로 자란 발톱은 내 것이 아닌 듯하다. 그래도 게으른 내 몸에서 저 홀로 부지런한 것은 케라틴 단백질뿐이다. 거품을 씻어내고 열탕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총 세 개의 열탕이 있다. 34도, 39도, 41도. 나는 가장 뜨거운 열탕에 몸을 푹 담근다. 겨우내 엉겨 붙었던 세포가 조금씩 일어나 몸 안에서 돌아다니는 느낌이다. 샤워만으로는 온몸이 일어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물속에 귀를 담그고 들어가면 물이 무엇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욕탕이든 수영장이든 물 자체의 성질은 변함이 없다. 인간이든, 돌이든, 무슨 덩어리이든 물은 자기 성질대로 대할 뿐이다. 그런 물을 보고 우리는 좋다 무섭다 더럽다 깨끗하다 한다. 그래도 물은 대꾸 하나 없이 자기 안에 들어온 것을 그저 감쌀 안을 뿐이다. 나는 물에게 안겨 있다.


무작위로 들려오는 잡음은 현실이고, 이것을 차단하기에 좋은 것은 단연 물이다. 귀를 물속에 넣으면 원하지 않던 채널이 사라지며 고요만 남는다. 보르륵보르륵 - 물속의 공기들이 자리를 이동하는 소리만 들려온다. 나는 양팔을 뻗으면 타일에 손이 닿는 작은 탕을 혼자 차지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처럼 떠 있다. 물은 발가벗고도 거리낄 게 없는 상념의 순간을 선사한다. 물속에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예지자와는 반대로 나는 오래된 과거를 본다.


나의 몸은 엄마와 목동 시장 어귀의 ‘목동탕’을 다니던 6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끼는 미미 인형을 목욕 바구니에 제일 먼저 챙기고, 바나나 우유를 약속받으며 언덕 하나를 넘으면 목욕탕이 나왔다. 엄마는 복작거리는 나신들 사이에서 겨우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 목욕 바구니를 세팅하고, 때수건에 비누를 묻혀 의자와 대야를 닦고, 나를 닦아준 뒤 뜨거운 물에 가서 놀다 오라고 했다.


나와 달리 미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열탕을 견뎠다. 그 고고한 미미와 함께가 아니라면 지루하고 뜨거운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한눈파는 사이에 몰래 냉탕에 들어가기도 했다. 냉탕의 시간은 고속열차의 속도를 냈지만, 열탕의 시간은 꽉 막힌 주말의 고속도로 같았다. 가긴 가지만 안 가느니만 못하게 갔다. 김 서린 시계를 얼마나 노려보았던가. 분침이 6에 오면 엄마가 나오랬지. 6이 될 때까지 참지 못하고 4와 5 사이에 튀어 나가면, 엄마는 내 팔을 엄지로 문질러 보고 때가 나오지 않으면 대야에 받는 물 온도를 한 칸 높였다. 엄마가 등에 물을 끼얹을 때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뜨거웠는데 내가 짜증을 내면 엄마는 뜨거워야 때가 나오지,라며 등짝을 때렸다. 내 몸 하나를 씻는 것도 어려운데, 그 무렵 두 딸을 모두 씻기느라 기운이 달린 엄마는 금방 지쳐서 인내심을 잃었다. 인내심을 잃은 엄마의 얼굴은 무서웠다.


지친 엄마의 손은 유독 매웠는데, 그 손에 때수건이 끼워지면 나는 ‘올 것이 왔구나’의 심정이 되었다. 엄마는 목부터 엉덩이까지, 손등부터 발등까지 구석구석 때를 밀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가장 작은 때수건을 찾아 내게 건네며 등을 돌렸다. ‘올 것이 왔구나’가 ‘본 떼(때)를 보여주겠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등은 뭐랄까, 작지만 컸다. 고작 자기 손 등 하나를 밀 수 있던 아이가 감당해야 할 성인 여성의 등은 아무리 작아도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예를 들면, 100호짜리 캔버스를 눈앞에 둔 느낌. 나는 엄마의 목덜미부터 허리선까지, 힘이 닿는다면 엉덩이까지 힘껏 밀어 내려갔다. 엄마의 피부는 너무 부드럽고 쫄깃하고 미끄러워서 신기할 정도였다. (엄마는 축복을 받았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처럼 국수 같은 때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 안 나오는데?” 내가 말했다.

“왜 안 나와, 더 해봐!” 엄마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등을 움찔거렸다.

“엄마, 뜨거운 물에 30분 안 있었지?”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는 듯이 추궁했다.

“엄마는 조금만 들어갔다 나와도 다 밀려.” 하며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미끌미끌 해 보이는 엄마.


부족한 힘을 탓하며 6세의 나는 무릎에 힘을 실었다. 손을 앙칼지게 쫙 펴고 엄마 등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나만 믿어(I've got your back)! 이태리타올에 대한민국 효심을 갈아 넣어 젖 먹던 힘까지 뽑아 썼다. 때가 나오지 않는 엄마의 등은 빨간 도화지로 변해갔다. 얼마 안 가 엄마는 물 한 바가지를 등에 끼얹으며 이 힘겨운 사생대회를 종료시켰다. 효도의 성취감 뒤에 바짝 따라 붙은 현기증을 느끼며 목욕탕 의자에 앉아 말했다.

“집에 갈 때 바나나 우유 꼭 사줘야 해.”


그날 나는 효심의 전리품으로 달콤한 바나나 우유를 얻었고, 엄마는 엎드려 잘 수 밖에 없는 밤을 얻었다. 목욕탕에 다녀온지 며칠 뒤, 엄마가 거울에 등을 비추며 고개를 돌려보느라 애쓰고 있었다.

“이거 봐, 하나를 시키면 누구보다 열심히 해, 우리 딸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엄마 등에 피가 났잖아?”

내 눈에 비친 엄마의 등은 목욕탕에서 봤던 찰떡 쫄깃의 백지가 아니라 피칠갑이 지나간 모래밭처럼 까끌거렸다. 눈이 서걱해져 손으로 비벼보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한동안 엄마의 등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 따가운 딱지가 다 떨어질 때까지.


내가 '적당히'를 모르고 미련하게 열심히만 하는 사람이 된 건 다 엄마 때문이다. 엄마의 무서울 정도로(?) 긍정적인 칭찬은 큰 부작용을 낳았다. 나는 '정도껏'의 기준이 남들과 다른 소심한 완벽주의자가 되었다. 피를 볼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꾀부림 없이 온힘을 다했을 때의 성취감이 아니면 성에 차지 않았다. 그게 미련함인 줄도 모르고 마흔이 되도록 번아웃의 현기증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온 나란 사람.


엄마의 등에 '피나도록 열심히'라는 갑골문자를 새겼던 효녀 때밀이....의 기억에 빠져들었던 몸을 일으킨다.

공기 중에 가득한 온갖 소리가 와락 하고 달려든다. 바가지를 던지는 소리, 거센 물줄기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등이 청각을 때릴 듯이 한꺼번에. 비현실에서 현실로 오는 방법은 그렇게 쉽다. 감각에 길을 터주면 된다. 마침, 세신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나.

*

*

이곳에는 두 명의 세신사가 있다. 복장 색깔에 따라 빨간 언니와 까만 언니라고 하겠다. (그들이 나이를 떠나 나를 언니라고 부르기 때문에 나도 언니로 대하는 것이 도리상 맞을 것 같다.) 원래는 빨간 언니가 내 예약을 받았는데, 식사하러 간 사이에 까만 언니가 대신 밀어주겠다며 나를 세신대로 불렀다. 나는 두 사람 간에 합의가 된 일인 줄 알고 지시대로 몸을 눕혔다. 까만 언니가 내 다리를 툭툭 쳐서 자세를 바꾸라는 신호를 주는 순간, 빨간 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욕탕에 울려 퍼졌다.

“언니 밥 먹으라니까! 그 언닌 내가 맡기로 했잖아!”

까만 언니가 별안간 나를 지목하며 답했다.

“이 언니가 힘들어하길래! 나 배 안 고파!”


나의 몸은 두 사람이 비늘을 벗겨낼 작업장의 생선에 지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떠보니 까만 언니의 안색이 아무래도 불편하다. 배가 안 고프다는 건 거짓말이고 작업비 욕심이 컸던 눈치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불공정거래를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 그저 입을 닫고 천장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벗겨만 주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 알몸과 감사와 영광이 영원토록 언니들께 있사옵나이다.


나의 묵은 비늘이 도마 위에서 반쯤 벗겨져 갈 무렵, 밥먹다 말고 부리나케 달려온 빨간 언니는 까만 언니의 손에서 우악스럽게 때수건을 벗겨 제 손에 끼었다. 그리고 숨돌릴 새도 없이 나의 나머지 몸통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도마 위의 나체 인간을 사이에 두고 벌인 실랑이는 정리됐다. 나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누군가를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기에 어쩐지 감개무량한 기분이 되었다.

“빨리 가서 옥수수 먹어. 내가 언니 거 두 개 남겨뒀어.”  

그 말의 온기 때문인지 욕탕의 축축한 수증기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애매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훈훈해졌다. 까만 언니는 옥수수로 허전해진 마음을 달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샴푸를 한다. 눈을 감고 거품을 문지르자 고등학교 기말고사 직후의 시간이 나타난다. 때는 기말고사가 끝나고 답안지에 적힌 각양각색의 주관식 오답들을 공개처형(?)하는 윤리 시간이었다. 모두가 오답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잊고 파안대소했던 오답이 있었다.


다음 문장은 불교에서 주장한 말입니다. 빈칸을 한자로 채워 넣으시오.
‘삶은 (  )이다.’


이 심오하고 심플한 문제는 점수를 거저 주기 위한 윤리샘의 은총이었지만, 우리에게 시험은 시험일 뿐이라서 쉬울수록 멀리 돌아가는 경향만 부추기고 말았다. 돌고 도는 고민 끝에 낸 친구의 OMR카드를 집어 든 샘은 파하, 하고 웃었다.

"삶은 (때)이다, 나와!"


하필이면 일년 내내 얼굴이 벌게서 사우나란 별명을 갖고 있는 윤리샘이었다. 불려 나온 친구를 보고 너 나 때문에 이렇게 쓴 거냐, 시험을 장난으로 치냐, 고 면박을 주느라 얼굴이 더 벌게졌던 그. 힘들고 거친 심상을 아무리 떠올려도 모르겠어서 몹시 괴로웠는데 그게 결국 ‘苦(괴로울고)’였다니 속상하다며 머리를 긁적이던 친구. 한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때가 때이니 만큼 종 치기 전에 써냈다는 합리적인 이유는 덤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때를 밀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한다. 삶은 더러운 때가 쌓이는 것이니까. 또 인생은 때(타이밍)를 잘 만나야 잘 풀리니까. 윤리시험만 아니었으면 친구의 답은 불교사상에 견줄만한 진리였으니까. 오답들을 처형하느라 사우나 효과를 톡톡히 본 샘이 나가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백했다. 샘은 본인의 은총이 우리들 마음속에 무수한 오답을 양산했다는 걸 아시는지. 한자를 몰라서 차마 적어낼 수 없었을 뿐이었다. 우리들의 오답 중에는 꽝, 똥, 짱, 알, 닭, 적, 약, 뻥 등이 있었다. 거품으로 엉긴 무수한 오답들을 쏴아- 하고 씻어낸다.


그런데 말입니다,

삶은 (빛) 아닙니까?

너무 순식간에 흘러가니까요.

게다가 저는, 뜻밖의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은 (빚)이라는 것을.


기억들을 주섬주섬 챙기며 나오는데 노을이 참 개운했다. 때를 잘 만난 오후의 사우나였다.


노답_ 때빼고 광내면 새 사람이 될까요?


뜨끈뜨끈한 목욕탕이 그리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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