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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Apr 18. 2024

좋아했던 것/사람들

최근에 가장 좋아했던 건 글쓰기도 커피도 아닌 돈이었다. 돈이 제일 좋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금전적인 여력이 선사하는 행복이 있었다. 올해 또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새로운 동네, 나만의 공간, 그곳에 채우고 싶은 이것저것들. 그걸 실현하기 위한 앞으로의 수입을 골똘히 계산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돈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에 몰두하고 있었던 지난 몇 주 동안, 한편으로는 끔찍하게도 좋아했던 다른 무언가가 더 이상 좋게 느껴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매일 마시던 커피를 줄여나가던 과정에서, 커피를 대하는 마음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코로 맡았을 때의 향기는 너무나 좋았는데, 막상 입으로 들어가면 쓰고 떫게만 느껴지는 순간들이 생겼다. 예전부터 술은 조금이라도 과하게 마시면 신기하리만큼 혀끝에서 맛없게 느껴지곤 했는데, 커피도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맛없게 느끼게 된 것이다. 싫어하던 술과 좋아하던 커피가 미각에서 동류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 혼자만의 옥신각신을 몇 번 겪고 나니,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던 커피 앞에서 설레던 감정을 잃어버렸고, 지치고 허망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들이 며칠에 걸쳐 꿈에 차례대로 나오기도 했다. 그들은 불쑥 나이가 들었거나, 곁에 다른 사람이 있거나, 하여튼 오랫동안 나라는 존재와는 무관하게 살고 있었던 현실의 모습으로 꿈에 등장했다. 누가 나오든 간에 일관되게 불편한 경험이었다. 반사적으로 요리조리 상대를 피해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기기도 했다. 깨어났을 때 나는 혼자 어두운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커피와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던 지난 한 달간, 커피와 비슷하면서도 커피가 아닌 것에서 삶의 낙을 찾기는 어려웠다. 뭘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딱히 좋아하는 게 없기도 했다. 무미건조하게 집과 회사만 오고 가는 삶이었다. 돈 쓰고 돈 벌고. 이대로 괜찮은 걸까.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는 출근길 버스에서 그런 상념이 머릿속을 공연히 떠다녔다.


커피가 생애 유일한 기호식품은 아니었다. 떡볶이가 좋아서 일주일에 두세 번을 먹거나, 오렌지주스가 좋아서 매일 한 잔씩 마시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커피와는 다르다. 여전히 좋아하기는 하지만 가끔 먹을 뿐이고, 안 먹는다고 기분이 심란해지지는 않는다.


좋아했던 사람들이 차례대로 꿈에 나타났던 새벽녘 이후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이제 그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원하고, 심지어 그 얼굴 모를 누군가와도 상처를 주고받는 미래를 지레 상상하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까지도 함께하기를 바랐으면서, 정작 그 지금에 와서는 잠깐 꿈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미안하고 부담스러운 일로 여긴다. 헤어진 후에도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실은 그들이 아닌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찬하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좋아했던 게 맞는지조차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언제부터 이렇게 어렵고 헷갈리는 일이 되었나. 이럴 거면 왜 그때는 그렇게나 상대방에 대한 확신을 필요로 했던 걸까. 가끔은 사람을 떡볶이나 오렌지주스와 별반 다를 바 없게 여기기도 했으면서 말이다. 그냥 필요한 때에만 찾고 아니면 물리고 싶어서, 그걸 원하고 또 그게 싫어서, 결국 혼자 있기를 택했던 밤들이 있었다.


그런 피곤한 자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엉키는 동안, 다행스럽게도 커피와의 거리 두기는 아주 조금씩 균형을 찾아나갔다. 매일 오전, 완벽히 만족스럽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만족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루는 디카페인을, 하루는 일반 커피를 번갈아 마시고. 온라인으로 괜찮다는 디카페인 원두를 찾아 주문해보기도 하면서. 어느 날은 커피가 마시고 싶었고,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커피 생각이 안 났고, 마찬가지로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간에 기분만 안 나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쉽지 않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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