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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use Jun 29. 2021

북텐츠 발제_다독한 미식가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박찬일.푸른숲.2012

대중에게 사랑받는 요리사인 박찬일은, 흔히 ‘글 쓰는 셰프’로 알려져 있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찬일은 원래 문학 공부를 하던 청년이었다. 그가 슬로푸드를 지향하고, 맛깔나는 문장을 조리해내는 배경에는, 분명 그가 거쳐온 삶의 경험과 인문학의 향기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리라.     


추억은 감각을 매개한다. 향긋한 홍차에 적셔 부드러움과 온도를 더한 마들렌 한 조각으로부터도 ‘잃어버린 시간’은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맛은 단순하게 혀 위의 감각(단맛, 쓴맛, 신맛, 짠맛 + 매운맛)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재료의 신선도와 조리법은 물론, 편의점에 포장되어 유통되는 기성 식품일지라도 한여름 피서지나 명절에 가족과 부대끼며 입에 머금는 ‘맛’의 기억은 같은가?

박찬일 셰프가 본문에서 주지한 바와 같이, ‘우리의 혀는 매우 이기적’이다. 연인과 함께한 데이트에서 ‘맛집’의 음식이 차마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던 일은 없는가? 직장에서 돌아와 경쾌하게 딴 맥주의 시원함은, 그날 노동의 강도가 가미된 적은 없었는가? 


박찬일 셰프 역시 여러 지역과 국경을 넘나들며 다양한 맛을 소개한다. 그의 생업이 요리인인 만큼, 300매가량의 수필은 맛깔나는 향연의 장이 된다. 그가 소개하는 ‘맛’으로부터는 요리사 박찬일, 아니, 사람 박찬일로부터 ‘추억의 맛’이 우러나온다. 특히나, 파스타 전문가 박찬일이 고집하는 ‘면 요리’에 대한 추억은 끊어내기 어려운 집착과 목을 얼얼하게 하는 생생한 질감이 가히 일품이다.

이는 분명 ‘박찬일 셰프’만이 지면에 올려낼 수 있는 ‘면 요리’의 맛과 추억일 것이다.


이처럼, ‘맛깔나는’ 식담(?)은 우리에게 식탐을 자아낸다. 누추한 외관의 중국집에서 먹는 귀한 짜장면, 가히 질긴 냉면발이 떠오르는 셰프의 경험담을 통해 우리가 일상 먹는 ‘짜장면’과 ‘냉면’조차 미식의 경지로 승화된다. (사실 어떤 음식이건, 우리가 맛있게 먹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그것은 미식으로 승화한다.)

그의 글 속에서, ‘자장면’이 아닌, 사라지지 않는 추억으로서의 ‘짜장면’이야 말로 진짜의 맛이다.

   

맛은 우리가 섭취하는 순간의 요소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맛에는, ‘과거의 추억’이 개입해온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이 맛이 아니야!’

우리는 먹어보지 못한 음식의 맛조차 ‘기억’하고 있다. 한여름 코카콜라 광고와 마주하면, 이 더위를 시원한 탄산 한 모금으로 청량하게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편의점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차가운 코카콜라의 맛은, 그저 코카콜라의 맛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원한 청량감’을 ‘맛본다’라는 만족감을 구입한다.


맛은 주관적인 즐거움이다. 맛은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면, 가장 먼저 그 지역의 ‘맛’을 음미한다. 지역의 지리적, 기후적 특성에 따라 많이 나고 소비하는 식재료는 대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과 ‘맛’으로 승화된다. 물론 이 맛만도 지리-환경적 요인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의 본문에서 부산 지역의 맛은 다음과 같다. 박찬일에게 부산을 ‘추억’하는 음식은 역시나 ‘밀면’과 같은 면 요리(그는 ‘사람이 미어터지는 유명 맛집이 아니더라도, 대개의 밀면집은 보통 이상은 하니 들어가서 잡숴보길’ 권한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거나, ‘국밥’과 ‘복국’ 같은 국물 요리인 모양이다.     

타향으로 기억되는 지역은 표면 떠도는 인상을 통해, 오감보다도 빠르게 우리의 ‘추억’에 새겨진다.

‘추억’ 혹은 ‘기억’이 우리가 감각하는 ‘맛’에 개입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각’ 자체에 개입할 여지도 충분하다. 풍경으로부터 떠오르는 정서에 따라 온도가 다르게 느껴지듯 말이다.

셰프의 추억을 우려내는 국밥 맛은 “생활의 달인이라는 호칭보다 그 무심한 표정 뒤에 숨은 아낙들의 오랜 세월의 인내”(같은 책 148쪽)로부터 읽어지는 맛이다. 진한 것도 묽은 것도 아닌, ‘정구지’와 함께 소복한 밥술을 집어삼키는 셰프의 입에는 “비곗점과 밥알과 설핏 말린 국물과 부산의 사투리와, 그리고 국밥만 평생을 만 주인할머니의 앞치마를 함께 씹어 넘기는 것”이며, “그것이 부산”이다.

미식의 대상은 음식만이 아니다. 그 지역의 문화, 혹은 속성과 분위기로 여겨지는 대상을 ‘체험’, 또는 ‘체현’하는 것을 통해 지역은 ‘향유’되거나 ‘소비’된다.

‘남포동의 노점’이나 ‘하이 소프라노 톤의 부산 사투리’가 들리는 ‘자갈치 시장’에서 “고등어를 잔뜩 구워주는 6천 원짜리 생선구이 집에 부산사람인 척 들어가”(위 책 146쪽)서 “묵에 소주를 걸치는 것도 부산사람 흉내 내기의 정점”(위 책 같은 쪽)이다.

마치 부산사람 ‘코스프레’와 같은 ‘부산사람-되기’는 ‘부산스러운 음식’으로 여겨지는 것을 직접 ‘섭취’함으로써 조미가 완성된다. “술 좋아하고 거친 부산 사내들의 호쾌한 음식”(위 책 147쪽)은 “이미 서울내기들에게도 유명한 곳”(같은 쪽)이다.

지역-타향은 누군가에게 “우울할 때면 기차를 타고 훌쩍 들르고 싶은”(위 책 148쪽) 힐링의 맛으로 낭만화되고, 셰프가 미식가로서 ‘부산의 맛을 추억할 때’ “부산에 조르지 않는 애인이나 묵은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같은 쪽) 하고 빌게 된다.


박찬일 셰프가 책의 본문에서 말하듯, 재료의 맛은 ‘테루아’로부터 나온다. 이는 식품 원재료인 유기물이 생장-순환하는 환경 전체가 주고받는 복잡한 ‘엮이고 섞임’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맛은 결코 단편적으로 파악될 수 없고, 추억과 인상이 다시금 현재의 감각에 되먹임된다.

‘관광’하는 것을 통해 ‘감각’되는 맛은 이와 같은 ‘나머지 절반’의 요소에 지분을 내어준다. 만일 ‘하이톤의 부산 사투리와 평생 국밥만을 만 무심한 아주머니’들이 내어주는 국밥을 ‘술 좋아하고 호쾌한 사내’들과 마시는 경험을 ‘부산’의 주민들로부터 납품받지 못한다면, ‘부산의 맛’에 실망할 것인가? ‘술 좋아하고 호쾌한 청년-되기’를 통해 ‘힐링’을 음미했다면, 지역을 ‘여행’하며 참맛을 음미한 것에 만족하는가? 미식가처럼.

 

‘글 쓰는 셰프 박찬일’은 미식가 마냥, 오직 ‘맛’에 관해서만 논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나머지 절반’ 역시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되새겨낸다.

“내가 시칠리아에 요리를 배우러 간다고 했을 때 (중략) 우습게도 그건 순전히 <대부>에서 얻은 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위 책 157쪽), “현실과 영화는 분명히 다르다. (중략) 전 세계 관광객들이 시칠리아의 어떤 작은 마을에 들른다. 오래되고 볼거리 하나 없는 그 마을의 이름은 ‘코를레오네Corleone’ 즉 돈 코를레오네의 고향 마을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오직 영화에 등장한 마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곳이 팬들의 성지순례 코스가 된 것이다.”(같은 책 158쪽)


“이름 붙이기, 즉 명명이란 종종 그 주체의 의사 따위는 묻지 않는다.”(같은 책 279쪽)


우리가 느끼고 감각하는 ‘맛’은 온전하게 ‘현재’의 순간이 아니다. 추억으로부터 떠오르는 ‘맛’도, 허기를 부추기고 식욕을 들끓게 하는 ‘맛’에 대한 욕망도, ‘지금 이 순간 먹는 음식에서 느껴지는 감각’조차도.

책의 제목을 뒤집어보자. 맛의 절반은 추억이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Daum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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