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전병

by 임월

어머니는 큰맘 먹고 사 오셨다는 소갈비를 정성스럽게 졸여 내놓으셨다. 달짝지근한 간장 향이 집안을 채웠고, 갈비는 젓가락만 대어도 결대로 흩어질 만큼 부드러웠다. 분명 만족스러운 점심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 정갈한 식탁 위로 투박하게 놓인 전병이 문제였다. 어머니가 손수 빚으신 그 전병은 속이 지나치게 알찼다. 고기 대신 담백하고 값싼 두부가 꽉 들어찬, 지독하게 건강하고 경제적인 맛. 입안에서 퍽퍽하게 으깨지는 그 효율적인 식감이 못 견디게 서글퍼, 나는 결국 철없는 반찬투정을 뱉어내고 말았다.


"전병에 무슨 두부가 이렇게 많아. 고기 맛도 안 나게."


비겁한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외가 식구들과 이따금 왕래를 이어가고 있었으나, 어머니는 당신만의 이유로 그들과 늘 일정한 거리를 두셨다. 어머니가 세워둔 그 서늘한 성벽 때문일까. 이제는 어른들을 마주해도 예전 같은 살가움은 느끼기 어렵다. 명절의 식탁은 그렇게 조금씩 좁아졌고,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졌다. 전병 속의 두부는 어쩌면 단출해진 우리 삶의 부피를 어떻게든 부풀려 보려는 눈물겨운 경제학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은 그 지독한 다정함에 고마워하는 대신, 우리가 상실한 '거창한 세계'에 대한 화풀이를 어머니의 접시 위로 쏟아부었다. 식탁 위로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고, 나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와 아이폰을 켰다.


내 갈증의 정체는 명확했다. 나는 가성비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은, 미련할 정도로 거하고 요란하며 비싼 음식을 원했다. "이건 비싸니까 빼자."라거나 "둘이서 뭘 이런 것까지."라는 식의 합리적인 검열이 완전히 거세된 그런 식탁. 우리 삶을 지탱해 온 그 알뜰하고 조심스러운 배려들이, 때로는 명절이라는 시간의 낭만을 가로막는 견고한 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할머니가 계셨던 어린 날의 명절은 달랐다.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한 수많은 사람이 좁은 집안을 무질서하게 메우고, 상다리가 휘어질 듯 요란한 음식들이 쉴 새 없이 날라졌다. 할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된 그때의 식탁은 효율을 따지지 않았기에 무구한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그 시절의 ‘그리운 거창함’을 배달 앱의 검색창에서 찾으려 애썼다. 족발. 내가 아는 배달 음식 중 가장 요란한 부피를 자랑하는 메뉴를 검색했다. 화면 속 족발 세트는 화려한 사진만큼이나 요란한 구성을 뽐내며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한참을 내려다보던 손가락은 결국 결제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멈춰 섰다. 액정 너머의 사진이 화려해질수록, 방금 전 식탁에서 마주했던 어머니의 굽은 등과 두부 가득한 전병의 묵직한 질감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플라스틱 용기에 차곡차곡 담겨 올 그 '정리된 고기'들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거창한 진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다. 내가 주문하고 싶었던 것은 비닐봉지에 담겨 배달되는 고기 덩어리가 아니라, 메뉴를 고르는 사소한 고민조차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의 그 무구한 풍경이었으니까.


배달 앱을 끄고 아이폰을 내려놓자,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가 아까보다 더 아득하게 들려왔다. 텅 빈 공간을 부유하는 이 기묘한 허기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예의이자, 단출해진 식탁 위에서도 기어이 '거창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못난 아들의 쓸쓸하고도 다정한 투정이다. 나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허기를 느끼며, 식어가는 전병 한 조각이 남은 식탁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를 내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