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테이프가 유리창을 가로지르던 날, 나는 열일곱의 내가 되어 있었고, 동시에 서른둘의 현재이기도 했으며, 아마도 앞으로 올 미래의 어느 시점이기도 했다.
창에 비친 얼굴이 시간의 켜를 지난다. 거울 속 교복 넥타이의 매듭이 아직도 서툴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서투름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진실된 모습은 아니었을까. 완벽하게 매어진 넥타이보다 어설프게 흐트러진 모습에 삶이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이해한다.
개항로는 시간을 쌓아 올린다. 육지 깊숙이 들어온 인천의 심장부, 백 년의 붉은 벽돌과 해방 후의 회색 시멘트가 겹겹이 뿌리내린 이곳에서 녹슨 창틀이 울린다.
종이와 먼지가 빛 속에서 부유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빛이 1970의 창고건물을 뚫고, 1980의 간판을 스치고, 1990의 에어컨 실외기를 넘어 떨어진다. 우리의 서점은 이 빛을 담아낸다. 색채가 유리면에서 부서져 무지개가 된 오후. 서가 사이로 스민 겨울은 우리를 수면 위로 분해했다가, 다시 모아가며 경계를 지우고 있었다.
책장과 책장을 거닐면 시계는 숨을 고르며 멈칫거린다. 과거가 미래 속으로, 현재는 과거의 틈새를 메운다. 구석에서 발견한 쪽지 - 이 책을 읽은 당신에게도 봄이 오길, 낯선 글씨체가 나를 뒤틀어놓았다.
활자 사이의 먼지. 창가를 적시는 빗방울 속에서 개항로가 번진다. 골목이 번지고, 육교가 번지고, 전차가 다니던 자리가 번진다. 모든 것이 먹물처럼 퍼져나가는 창가에서, 나는 인천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읽어내고 있었다. 비에 젖은 유리창이 도시의 비밀스러운 문자가 되어 반짝인다.
기억은 빗물 속을 떠돈다.
여름의 책은 부풀어 오르고 겨울의 책은 수축한다. 서가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장마철이면 곰팡이가 종이를 적시고, 건기의 바람은 글자를 부식시킨다. 책등이 휘어지고 종이는 달라붙는다. 개항로의 건물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동안, 서가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타인의 체온이 스민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시간이란 게 이런 것이었나 싶었다.
여기서 발견한 구두점 하나가 내 청춘의 전부를 설명할지도 모른다. 쉼표 하나에 걸려 넘어져 울던 밤도 있었고.
형광펜 자국. 여백의 지우개 가루. 커피 얼룩 위에 박힌 한숨. 문학전집 사이의 영화표. 밤늦게 넘긴 페이지에 묻어난 카페인. 연필로 휘갈긴 전화번호.
첫사랑이 발효되는 냄새.
종이와 종이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교환했다. 활자보다 선명한 떨림이 책장을 울린다. 어떤 페이지는 펼칠 때마다 다른 계절이 된다. 시집 한 권의 무게는 청춘의 무게와 같았다.
창가 의자의 나뭇결이 시계를 멈춘다. 카프카를 읽던 자리, 현실이 옅어지고 비현실이 응결되던 자리. 열일곱은 이 자리에서 연금술을 배웠다. 의자가 삼킨 방과 후 교실의 분필 가루, 등받이에 녹음된 하교 시간의 종소리. 서점의 모든 공기가 우리의 숨으로 채워져 있다.
주인의 굳은살 아래, 시간이 닳아간다. 카운터를 닦아내는 손에 한 시대가 지워진다. 철거 장비가 도착하고, 곧 이별의 색으로 물들었다.
대형 서점의 형광등은 이 어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듯하게 정렬된 서가는 우리의 굽이굽이한 시간을 담아내지 못한다. 새로 칠한 바닥은 우리가 남긴 발자국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무너지는 건 책장이 아니다. 우리가 매달려 있던 중력이 사라진다. 여기 쌓인 모든 가능성과 미완의 문장들이,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이 허공에 흩어진다.
벽돌 틈으로 열일곱의 떨림이 새어 나온다. 발걸음은 과거의 울림을 밟는다. 서가 사이를 배회하던 사고가 벽돌 조각에 새겨진다.
철거가 진행되는 동안, 벽은 기억을 내뿜는다. 여기서 자란 생각들, 여기서 발효된 상상, 여기서 응결된 감정이 대기를 채운다. 벽지가 품은 한숨의 온도, 바닥의 긁힌 자국이 만드는 소리. 창틀에 맺힌 빗방울 속에서 개항로가 일그러진다.
쇠망치 소리에 시간이 흔들린다. 벽이 무너져도 우리의 떨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개항로의 지층을 영원히 떠돌 테니까.
벽은 부서져도 기억은 남는다. 우리는 지워지지 않는다. 붉은 테이프가 가로지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너는 알고 있는지.
지나간 순간들이 여전히 여기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