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주

by 임우유


그러니까 나는 쉬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쉬어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2023년 한 해가 나라는 인간을 속절없이 부서뜨려 놓았으므로. 2024년이 온다는 것이, 어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온다는 것이 낭만이나 신선함보다는 협박처럼 느껴졌으므로. 더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이 괴로움에 매몰되지 않고 괴로움을 피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서 도망을 택했다. 1년의 휴직 생활은 그렇게 시작했다.


글 쓰는 걸 제법 좋아하고 어떤 날은 도저히 글로 뭔가를 써서 토해내지 않으면 머리가 메스꺼워지는 날도 있었지만, 휴직 초반 4개월 동안은 단 한 토막의 글도 써낼 수가 없었다. 그저 원할 때 아무 때고 잠들어 신생아처럼 통잠을 내리 잤다. 9시에 깨서 30분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또 눈을 감으면 잠이 솔솔 쏟아졌다. 오후 1시가 돼서야 직립 보행을 시작했고, 챙겨 먹는 첫 끼니는 늘 헐겁고 가벼웠다. 곱게 쳐줘야 한량인 그 4개월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남은 휴직 기간은 고작 두 계절치뿐이었다. 다급하고 조급했다. 이렇게 지나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기획한 건 13박 14일짜리 휴가였다. 아주 길다고 하긴 어렵지만 회사에 다니는 동안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던 기간 동안 홀로 훌쩍 떠나겠노라고. 보름 가까이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평일에 출발해 평일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비행기 티켓을 발권해 본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그 무엇도 두렵거나 거슬릴 게 없었다. 여행의 모든 요소를 오로지 나의 호오에 맞춰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는 건 그렇게도 홀가분한 일임을 그제야 알았다. 너무 사치스러울까, 누군가의 눈치를 보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곳을 숙소로 고르고 하루치의 일정이 고작 열두 글자 안에 정리되는 — 사실상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는 — 일정을 짜놓고 마음 놓고 신나 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연착륙해 시작된 여행. 다음 도착지를 모른 채 늦은 아침에 산책을 시작하곤 혼자 카페에 틀어박혀 한두 시간을 내리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을 토독토독 눌러가며 글을 썼다. 1인분의 식사를 거리낌 없이 주문해 남기지 않고 먹었고, 너른 인심으로 채워주는 글라스와인을 주문해 홀짝거리는 저녁 식사도 했다. 8월의 유럽은 눈부셨고, 쏟아지는 햇빛엔 한 겹의 거친 결이라곤 없었다. 무계획의 게으른 여행은 어떤 조그마한 불안이나 파도 없이 마음에 꼭 맞는 잔잔한 유속으로 흘렀다. 프랑크푸르트와 뮌헨, 베를린을 거쳐 바르샤바와 그단스크를 지나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는 여정. 내딛는 걸음마다 사랑할 것들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찾아냈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얻어지는 발견이었다.


13박 14일의 여행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안팎을 향하는 사랑으로 충만했고, 좀처럼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이 없었다. 쓰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고, 오랜 시간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달라진 사람으로 쌓은 힘으로 몇달 뒤엔 더욱 긴 여행을 떠났다. 11월의 바르샤바에서 조성진이 치는 더없이 아름다운 트로이메라이를 들었고 베를린에선 예약 없이 자리에 앉기 어려운 재즈바에서 칵테일을 홀짝였으니 과연 기가 막힌 팔자였다.


한 해를 체에 걸러내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남을 것 같은 작년이었다. 쓸 만큼의 돈을 주머니에 어느 정도 넣어둔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옭아매던 회사를 벗어나 보낸 1년은 짜릿하리만큼 달콤했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행복을 머무르게 두지 않았고, 휴직은 종료되어야 했으며 올해가 밝아옴과 동시에 나는 많은 것들을 자연히 잃어버렸다. 잔잔한 평화와, 나의 안팎을 향하던 사랑이나 발에 채게 마주했던 소소한 아름다움들을 새해는 모조리 앗아가 버렸다. 평평하고 매끈매끈한 바닥만 주어지면 어디서든 잘 잠들던 나의 능력까지도.


20년 넘게 집에서 회자된 얘기가 있다. 언니 방에 있던 2층 침대에서 잠을 자던 시절, 2층에서 여섯 살배기인 내가 잠을 자다 쿵 하고 떨어져 엄마가 소스라치게 놀라 달려왔는데 바닥에서 내가 잠 한번 깬 적 없이 계속 자는 중이어서 기가 막혔다는 얘기. 머리만 대면 순식간에 잠드는 것, 잠에 들면 아주 오래도록 단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천부적이고도 오랜 재능이었다. 수면장애라는 단어는 그러니까- 인생에 등장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단어였다.


복직일을 앞둔 마지막 밤. 13시간씩 자던 나는 고작 3시간 14분을 자는 데 어렵사리 성공했다. 그 다음 출근일에는 4시간 17분을 잤다. 잠자리에 들어 잠에 드는 것은 쉬웠으나 얄궂은 새벽녘에 꼭 잠에서 깼다. 출근을 하려면 깨야만 하는 6시 경을 얼마 앞두지 않은 5시 반쯤 깨는 건 차라리 감사한 일이었다. 4시 20분, 3시 26분, 3시 50분, 4시 56분……. 알람이 울릴 때까지 눈 한번 뜨지 않고 잠드는 일이 신체에 이다지도 이로운 일이었을 줄이야. 새벽에 꼭 한 번씩 깨고 출근하는 내게 집중력 있고 활기찬 하루가 시작될 리 만무했다. 업무는 휴직 전에 해오던 것과 별다르지 않았지만 좀처럼 의지를 갖고 버티기가 어려웠다. 글이라는 걸 쓰는 건 휴직 후의 일상에서는 대단한 사치였다. 출근, 근무, 퇴근, 아주 가끔의 운동, 그보다 드문 개인 약속. 이것들 사이를 오가기만 하다 어느덧 길거리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깔렸다.


벅찬 매일매일의 새벽을 보내며 출퇴근으로만 범벅된 재미라곤없는 한 해를 보내며 내가 가장 골몰했던 일은 평행우주를 상상하는 일이었다. 그 우주의 나는 결혼을 하고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나는 휴식도 모르는 엄마가 된다. 엄마가 된 나는 휴직을 하지 않는다. 작년의 행복은 그 우주에서는 사라져 있다. 엄마로서의 삶을 사느라 바쁘고 때때로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이 일렁일 뿐이다. 또 다른 우주의 나는 어떤 해에 누군가의 눈빛을 아주 면밀히 관찰하는 데 성공한다. 그 눈빛 안에 나를 향한 호감이 있음을 깨닫는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이끄는 대로 끝도 모르고 깊이도 알 수 없이 뜨겁고 단단한 사랑에 빠진다. 결혼이라는 걸 하지 않는 내가 있는 우주도 있다. 다른 대학교에 가고, 다른 회사를 고르고, 이 우주의 나는 겪어본 적 없는 흐름에 부대끼며 산다. 또 어떤 우주에서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그 우주에서 나의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도 아빠를 사랑한다. 둘은 헤어지지 않는다. 나는 둘째로 태어나지 않고, 사랑을 물려받지 않는다…….


이루어질 수 없어 무의미할지 모를 우주들을 상상하는 데 매몰돼야만 억울한 새벽 뒤 찾아오는 공허한 아침들을 견딜 수 있었다. 무수한 평행 우주에 대한 나의 가냘프고 연약한 가설들은 다른 우주의 삶에선 이 우주의 나를 단 한 순간도 만날 수 없다는 그 당연한 진실에 가닿고 나서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시간이 주어진 삶은 불가역적이고 힘이 없는 나는 순서대로 켜켜이 쌓아온 순간을 되돌리거나, 이미 끼워져버린 어떤 시간 조각을 집어내 다른 곳에 끼워 넣을 수 있는 재주가 없다. 올해의 아침들이 버거웠던 이유는 체로 걸러내면 행복만 남을 것 같은 작년을 보냈기 때문이며, 작년에 내가 행복했던 이유는 재작년의 내가 힘들어서 휴직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휴직을 결심케 한 재작년의 고통은 너무도 맞지 않는 통제형 상사에 기인했고, 그 통제형 상사는 내가 또 그가 이 부서로 전배를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지 않았을 인연이다. 이 우주에서, 결국은 헤어지게 되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 둘째로 태어난 내가 한순간 한순간 쌓아왔어야만 오늘이 도래한다.


작년 여름 바르샤바에서 쾌적한 여름 햇살이 가득한, 푸르른 신록이 눈부시던 와지엔키 공원에 들어서며 발음할 줄 모르는 이름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쇼팽을 듣던 순간을 기억한다. 너무도 설레 아주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잊히지 않을,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귀중한 황홀이라고 여겼던 그때를. 이 우주에 남아 있어야만 그때를 기억하는 나도 존재할 수 있다. 이제라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사랑, 결코 잃어버릴 수 없이 소중한 추억 모두를 지키려면 불행하고 고단한 오늘의 우주는 내일도 이어져야만 한다. 언젠가 또 만날, 이 우주에 남아 있어 기쁘다고 말하게 될 미지의 행복과 아름다움에 기어이 도달하도록.



2025년 마지막 날 업로드하려고 했지만 까먹어서 새해 첫날에 업로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