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과의 포옹

by 임우유


그를 안아보고 나서야 내 안에 오래도록 품어온 꽃봉오리가 있음을 알았다.


나는 이렇게 첫 문장을 쓴다. ‘작가는 첫 문장과 끝 문장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좋아하는 작가가 말하는 걸 어느 영상에서 보고선 그와 나의 이야기를 쓴다면 어떤 첫 문장과 끝 문장을 쓰면 좋을지 고민한 결과다.


끝 문장은 영원한 바람의 문장으로 마음속에 이미 정해져 있다. 고백의 첫 문장과 영원한 바람의 끝 문장 사이에 나는 무수한 장면을 끼워 넣을 수 있다. 이를테면-


나이와 의욕이 모두 젊었던 오래전 어느 날 적당한 거리에서 그를 우러러본 일. 아주 늦도록 그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구별하며 들었던 일. 대단히 어렵지 않은 일을 몹시 정중하게 부탁받았던 일. 그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던 일. 조금 가까워진 일. 좁고 네모난 곳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일. 멀리 떨어진 일. 멀리 떨어짐을 아무도 모르게 아쉬워했던 일. 함께 보냈던 순간을 까무룩 잊어버렸던 일. 나를 데면데면해하는 그의 거리감에 이유를 모르게 서운했던 일. 다시 조금 친밀해졌던 일. 그의 타고난 성격 탓에 태어나는 발화와 행동을 귀여워했던 일. 작은 습관이나 버릇을 한두 개 알게 되었던 일. 멀리서 솟아오르듯 보인 그의 얼굴이 아주 반가웠던 일. 그리하여 아주 오랜 세월 끝에 마침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와 마주해 본 일. 하염없이 여유롭고 조화로운 햇살을 함께 맞았던 일. 함께 걸으며 들었던 모든 소리가 귀에 무척 기껍게 들렸던 일. 감각이 둔해질까 봐 섣불리 배불러지고 싶지 않았던 일. 여전한 다정함과 그의 성정에 고마웠던 일.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도록 지루함이 없었던 어떤 수요일 저녁의 일…….


눈 떠 보니 그와의 밤이 지나가 버리고 사라져 있던 일. 잃어버린 기억을 그가 성실히 기워주었던 일. 기대고 있던 어깨가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일. 그에게 기대고 있을 때, 왼쪽 관자놀이 위에 쏟아지던 햇살이 그가 내민 오른손에 가려졌다 말았다 했던 일. 입을 맞춰달라고 말하는 그 앞에서 부끄러워했던 일. 몇 초의 부끄러움 끝에 그에게 입을 맞췄던 일. 그의 입술에 묻은 소주가 달다고 생각했던 일.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성실하게 서로에게 입을 맞췄던 일. 더 돌진하기 위해 인내하는 그의 호흡을 야하다고 생각했던 일. 앞으로가 어찌 될지 서로 밀알만큼도 모르는 채로 그를 품에 가득 안아주고 싶었던 일. 그리하여 꼭 안아본 일. 거짓이 조금도 없는 말을 그의 귀에 속삭여본 일. 그와 나눈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고민해 본 일. 한 사람을 그런 식으로도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음을 알았던 일.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 주저했던 일. 같은 사랑을 화답 받은 일. 매일매일 사랑을 고백했던 일. 그 곁에서의 나의 모습이 스스로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던 일.


끝내 버림받았던 일. 한없이 가까웠던 그와 더없이 멀어졌던 일. 듣기가 두려웠던 대답을 들었던 일. 그 대답이 마음에 몹시도 사무쳐 밤이 새벽이 되도록 조용히 울었던 일. 그와 나의 이야기를 옮겨 담은 것 같은 영화를 보고 오열했던 일. 지치지도 않고 그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 다시 마주친 일. 가끔 보게 되는 아주 작은 뒷모습도 귀해서 눈을 느리게 깜박였던 일.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을 ‘Out of mind, out of sight’로 바꿔야 한다고 믿게 됐던 일. 잃어도 잃지 못했던 일. 며칠에 한 번은 꿈에서도 그를 만났던 일.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던 일.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심장 소리를 듣게 됐던 일. 내 입술을 파고드는 그의 입술이 더없이 뜨거웠던 일. 안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어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일. 어딘가 조금 마모된 것 같아 보이던 그의 영혼이 마음 아팠던 일. 아주 오래도록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던 일. 좋아했던 그 폭신한 어깨를 다시 베어 볼 수 있어 기뻤던 일. 이해할 수 없던 사랑 노래의 가사를 완벽하게 이해해 버린 일. 그가 좋아하던 아름다운 시를 어느 가을날에 비로소 암송할 수 있게 되었던 일. 사랑은 혼자서도 아마도 영원히 지속할 수 있음을 깨달았던 일…….


사랑하기 어려운 시절에 찾아온 그를 지나치게 사랑해 버린 대가로 나는 한없이 돌아가고 싶어지는 무수한 장면들을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서 영사해 내야 하는 형벌을 얻었다. 그 끝도 모를 형벌이 괴롭다 하여 형벌을 받지 않고 그를 모르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하여 나는 사랑하기 쉬운 시절에 만나 사랑으로 춥지도 않은 겨울을 보내는 상상을 하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무수한 장면들 중 하나를 지치지도 않고 영사해 내며, 현실이 되지 못하고 영원한 바람에 머물지도 모르는 끝 문장으로 한순간 더 가까이 간다.


‘나는 곤히 잠든 그의 이마 위를 흐트러지게 덮고 있는 그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넘긴다.’



글감은 ‘화근’이었고, 이건 화근마저 아끼는 사람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