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마니아> 이후 10년
원문: <긱리스트>
giglist.com/buzz/article/veteran-music-writer-simon-reynolds10-years-retromania
2020년 9월 17일
인터뷰: 마일스 엘링엄(Miles Ellingham)
노련한 음악 저술가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이후 10년
사이먼 레이놀즈는 지난 40여 년간 음악에 관한 글을 써왔으며, 수많은 기사와 비평계의 극찬을 받은 여덟 권의 책을 출판했다. 레이놀즈는 <에너지 플래시>Energy Flash(1999)에서 1990년대 레이브 음악에 대해, <찢어버려 그리고 다시 시작해>Rip It Up and Start Again(2005)에서 포스트펑크 반란에 대해, 그리고 <레트로 마니아>(2010)에서 그 자신의 과거를 집어삼키는 데 중독된 대중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장 최근의 책 <충격과 경외>Shock and Awe(2019)는 글램록에 관한 것이었다. <긱리스트>는 로스앤젤레스 자택에 있는 레이놀즈와 함께, 포스트펑크, 레이브 문화, 마크 피셔, 음악의 탈상품화, 음악의 미래를 향한 희망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2010년에 책 <레트로 마니아>를 썼다. 레트로 마니아란 무엇인가? 이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밀레니엄 전환기에 광대역 인터넷과 스트리밍 그리고 디지털 문화와 함께, 레트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쳤다. 물론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드 리바이벌이 있었고 이런 리바이벌리즘이 죽 있었으며, 패션은 항상 자신의 과거를 되새김질―이게 패션이 작동하는 법이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트로라는 것은 21세기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이를 둘러싼 광적인 감각이었다. 갑자기 괴상한 밀레니얼 신드롬이 생긴 거다. 공연 내내, 아이콘이 된 자기네 옛날 앨범들을 다시 연주하는 소닉유스 같은 밴드들이 있었다. 아주 새롭게 들리는 건 없었다. 악틱 몽키스는 포스트펑크 미학을 복원했고, 론슨과 와인하우스는 모타운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젊은이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감정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 당신이 환기시키는 감각은 일종의 정체다. 왜 미래가 그때는 너무 멀리 물러나 있는 것 같았나?
2000년대는 침체되어 있었다. 주요한 움직임이 실제로 출현하지 않았다. 레이브 문화나 힙합 수준에서도 없었다. 덥스텝처럼 과거로부터 연속적인 움직임은 존재했지만, 덥스텝은 스스로를 잘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이 뿌리를 두고 있는 정글이나 레게 같은 것을 숭배했다. 덥스텝이 과거에 접근하는 방식은 학문적인 것에 가까웠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와 하이브스 같은 밴드들이 일으킨 또 다른 개러지 펑크 리바이벌도 있었는데, 이런 리바이벌은 내가 살면서 서너 번쯤 겪었던 것 같다. 회고적인 프릭포크도 있었다. 모두 본질적으론 옛날 음악이다. 새로운 기술이 맞물려 과거를 열어젖히자 미래는 심각하게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이 시기의 가장 흥미로운 아티스트들은 이 문제를 깨닫고 과거를 갖고 놀기 시작했다. 애리얼 핑크 같은 사람이나 고스트박스 레이블이 그 사례다.
당신이 <레트로 마니아>를 쓴 이후로 10년이 흘렀다. 상황은 더 나아졌는가?
힙합은 잘 굴러가고 있다. 트랩은 매우 흥미롭지만 본질적으로 또 다른 형식의 힙합이다. 하지만 나는 낙관적이고, 음악의 지난 10년은 그 이전의 10년보다 미래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빈티지 미학의 지배력은 다소 수그러들었다. 그 밖에, 눈에 띄었던 것은 목소리 및 보컬과 관련된 트랜스-장르 전환이다. 목소리 실험에 대한 깊은 관심이 출현했다. ‘탑40’이든 트랩이든 빌리 아일리시든, 내게 흥미로운 것들은 모두, 목소리를 가지고 놀랍고 이상한 일을 하고 있다. 영 서그와 퓨처 같은 보컬들은 모두 건축적인 하모니와 멜로다인(Melodyne, 튠 프로그램) 기술을 사용해 매우 혁명적인 방법으로 목소리를 조작한다. 1990년대의 혁신은 모두 비트 및 리듬과 관련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목소리가 행동이 일어나는 곳이다. 아르카, 홀리 헌든, 아니면 소피를 들어보라.
사람들은 ‘미학화’된 미래 개념―미래적으로 보이거나 미래적으로 들리지만 전망은 덜 진보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정글이나 크라프트베르크 같은 것을 이와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질문이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에 관한 생각은 오랫동안 클리셰였다. ‘내일’은 <아우토반>이 발매되었던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클리셰였다. 크라프트베르크는 미래에 대한 1930년대의 생각을 레퍼런스로 사용했다.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미래는 기술이 훨씬 더 친밀한 곳이다. 나는 1990년대에 정글과 테크노에 푹 빠져 있었는데, 미래에 대한 그것의 전망조차도 아주 키치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 느꼈다. 드럼앤베이스 앨범의 아트워크 몇몇은 지금 봐도 진부함이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 같다. 미래는 우리가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다.
당신은 디지털화와 탈상품화가 음악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주 썼다. 이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어떻게 음악가들이 벌어 먹고살 것인가의 문제를 잠시 잊어버리면, 표면적으로 음악의 탈상품화는 좋은 일 같아 보인다. 좌파적 관점에서 상품시스템 밖으로 나가는 건 구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공짜로 얻으면 덜 가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면 그것과 더 진지하고 강한 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 세대는 어렸을 때 쓸 수 있는 돈이 한정되어 있었고, 음악을 소비하려면 외출이나 새 옷을 희생해야 했다. 그리고 음반을 사면 거기서 가치를 되뽑아내겠다는 희망을 품고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때는 음악 취향을 추구하려면 가로질러야 할, 흥미로운 희소경제가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뭐든지 가질 수 있게 되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픈 유혹을 느끼고 개인이 소유한 음반과 훨씬 더 찰나적인 관계를 맺는다. 사람들은 포스터를 사듯이 같은 방식으로 음반을 산다. 우리 집 애들의 바이닐은 그냥 저기 놓여 있다. 실질적으로 음반은 재생하기 불편하다. 그냥 사랑의 토큰이고, 때로는 아주 값비싼 애정 표시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당신의 동료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케이펑크(k-Punk) 블로그는 당신의 블리스블로그(Blissblog)와 비슷한 생각을 자주 지지했다. 그는 비극적이게도 4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달라.
분명히, 마크는 학계에 남긴 유산이 있다. 천여 명의 박사들 얼굴에 혈색이 돌게 했고 ‘마크 피셔 연구’는 학제와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작업은 대중문화와 이론 사이에서 매우 매력적인 접점을 지니고 있었고, 매우 잘 쓴 글이었다. 피셔를 접한 젊은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관심 있는 것들에 대해 실제로 쓸 수 있구나!” 피셔는 이런 느낌을 자아낸 드문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히치콕과 크리스토퍼 놀란을 분석하려고 라깡을 사용하는 슬라보예 지젝 또한 그런 듯싶다. 마크는 또한 정치적 유산도 남겼다. 포스트-자본주의 세계와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려고 애썼고, 그가 애시드 코뮤니즘(acid communism)이라고 불렀던 것의 전망을 연구했지만 끝내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주요한 유산은 음악 속에 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혼톨로지(hauntology)에 관한 그의 작업을 읽었고, 수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그는 그들이 수행하는 자기교육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이 음악 애호가들이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같은 이름과 비판이론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통로로 기능했다. 그는 이러한 사유 방식을 퍼트리는 사도다.
피셔의 ‘혼톨로지’ 개념―과거로부터 귀환해 현재에 출몰하는 유령들―과 <레트로 마니아>에서 당신이 한 작업은 비슷한 느낌을 다루고 있다.
사람들은 내 아이디어, 그리고 혼톨로지와 죽지 않는 미래(undead futures)라는 마크의 아이디어를 엮어보려는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제일 신나서 다음에 보고 싶은 건, 젊은이들이 현재에 반대하는 견해를 공격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마크와 나는 비슷한 종류의 양극성 장애(bipolarity)를 겪었다. 정신질환―마크는 실제로 이것과 싸워야 했지만―이 아니라 세계관의 측면에서 그랬다. 우리는 글쟁이로서, 이 빌어먹을 엔트로피의 세월을 함께 헤쳐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부서지고 눈앞에 펼쳐지는 미래를 보게 될 것이다. 광란의 레이브와 개러지와 초기 그라임으로 이어졌던 시기는, 내 생각에 우리가 겪었던 가장 긴 기쁨의 시간이었다. 10년간의 조증기가 지나자 2000년대 중반에는 폭락이 뒤따랐다. 레트로 마니아와 혼톨로지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당신은 포스트펑크가 등장했을 때 성년을 맞았고, 결국 이 장르에 대해 <찢어버려 그리고 다시 시작해>라는 책까지 썼다. 당신에게 포스트펑크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것은 음악 팬이 된다는 것의 양극성 장애적 성격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얘기와 관련이 있다. 포스트펑크에서 흥미로운 점은, 특히 영국에서 그랬는데, 음악언론과 음악문화가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작용했던 방식이다. 우리는 제안을 하고 이에 맞서는 반응을 한다. 음악의 각 국면은 갈 데까지 가보자며 어떤 경향성을 받아들였고, 그러고 나면 “넌 뭔가를 놓치고 있어”라고 말하는 반응이 있었다. 그래서 펑크는 날것의 공격이자 폭발적인 반항이었고, 포스트펑크는 “그래, 하지만 그건 슬로건처럼 됐고, 음악은 정체됐어. 우리는 비판을 더 정교하게 할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과도하게 머리를 썼고, 뉴팝(New Pop)과 만난다. 이건 더한 ‘재미’가 있었다. 각각의 반응과 반작용을 따라가는 건 신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음악에 대한 논쟁에 납득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음악이 곧 논쟁이었기 때문이다. 음악과 비평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모든 음악작품은 일종의 비판적 발언을 담고 있다. 그리고 비평이 잘 이루어진다면, 일종의 음악성에 접근할 수 있다.
현재 영국에는 ‘영국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 외려 역겨운 우파적인 자기성찰이 있다. 애국심을 느끼게 하는 음악이 있나?
이 이야기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이모님이 사시는 요크셔 데일스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연로한 어머니, 이모님과 함께 우리는 드라이브를 하면서 근사한 시골, 오래된 돌담, 양떼 따위를 지나쳤다. 그때 갑자기 라디오에서 아프로퓨처리즘에 관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코드워 에슌(Kodwo Eshun) 형제가 진행하는 BBC 라디오4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나는 해가 중천에 뜬 아침에 나이 지긋한 혈육들과 함께 차 안에서 노이즈 팩토리(Noise Factory)를 들었다. 노이즈 팩토리는 내가 열광했던 하드코어 레이브 그룹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애국심을 느꼈던 것 같다.
당신은 1980년대부터 음악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잡지, 블로그. 책까지 모든 매체의 음악 글쓰기를 보았는데, 음악글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딱히 좋은 아이디어는 없다. 사람들이 음악글에 돈을 지불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면, 미래는 별로 없을 듯싶다. 사람들은 무료로 비평을 보는 데 익숙해 잡지 구독 모델을 다시 상상하기 어렵다. 이 구독 모델은 사업이 굴러가고 필자들에게 합당한 페이를 지불할 수 있도록 보장했던 방법이다. 부유해질 수 있는 영역이었던 적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글을 쓰면서 빠듯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제대로 지불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 일에 덜 시간을 쓴다. 페이가 낮은 필자들은 직접 인터뷰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그것에 대해 깊이 파고들 감각이 없기 때문에 결국 진짜 저널리즘이라고 하기 뭐한 것으로 흐지부지되고, 순전히 수동적이 된다. 음악 저널리즘은 이러한 여러 방식으로 갉아먹히고 있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이걸로 돈을 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지불할 수 있도록 하느냐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