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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야 Sep 13. 2021

MEMO-1

2021.09.06 ~ 2021.09.13

< 1 > 

근황_2021.09.06(월)


 브런치에 글을 업로드하지 않은지 벌써 180일이 지났다. 그동안 개인적인 일들로 인해 온전히 글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비슷한 시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것 같다. 아직 배울게 많고 생각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하나의 글을 완성시키는 일은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지식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짧은 문장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어떨까? 장담하건대, 하나의 글을 완성시키는 것보다 적은 노력이 들 것이라 생각한다. 주제가 고갈되지 않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또한 힘든 일이 될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눈앞에 아른거리던 생각들을 효과적으로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전에 말했던 데로 진화생물학과 관련된 몇몇 책들을 읽고 있다. 인간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진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어느 학자의 말을 믿기 때문이다(보잘것없는 기억에 기대자면, 이 말을 한 후보로는 스티븐 핑커,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도킨스가 있다). 믿음의 결과가 어떨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진화가 우리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도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내리는 결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설령 학계에서 충분한 결론을 이끌어냈다고 하더라도 내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왜 군중심리에 휩쓸리는가? 우리의 원시적인 조상에게는 이런 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 같다. 목소리 크고 리더십 있어 보이는 이가 주도적으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 목록을 전할 때,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은 우리 조상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원시 실험실은 무자비한 실험을 강행했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빠지는 '인지적 편향'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떻게 상대방의 첫인상만 보고 그 사람의 말투나 행동, 성격 등을 짐작할 수 있을까?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 '귀여운' 행동을 하면 우리는 괴리감을 느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괴리감 때문에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기도 한다. 기준이 되는 첫인상에 비해 그가 친절하고 공손한 말투로 우리를 대할 때 우리는 실제보다 그를 더 좋은 사람으로 여긴다. 직관적으로 파악한 첫인상이 너무 낮은 점수를 받은 나머지 다른 부문에서 '가산점'을 받은 셈이다. '생각보다 괜찮은' 그에게 우리는 끌린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예상'을 하고 예측을 기준으로 행동한다. 가령 당신의 포트폴리오에 속한 주식 중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주식이 갑자기 크게 상승한다면 깜짝 놀란 당신은 소리를 지를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주식이 폭락한다면 심하게 우울해질 것이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가 지레짐작해서 '좋은 주식'이라고 점찍어 둔 그 주식은 순식간에 간악한 반역자로 전락한다. 우리는 우리가 '예상한' 기준에 따라 울고 웃는다.


 지금까지 내가 한 질문, 그리고 앞으로 할 질문들 중 몇몇은(어쩌면 대부분은) 저명한 학자들이 이미 합의된 결론을 도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들은 별로 중요치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만의 '격자틀'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 2 >

유전자 결정론과 통계적 사실_2021.09.06(월)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이기적 유전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평가들은『이기적 유전자』가 이기심이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의 원리라고 주장한다고 오해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제목만 보거나 처음 2쪽 이상 읽지 않았겠지만, 이기심이나 그 외의 심술궂은 태도가 좋든 실든 간에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내가 말했다고 생각한다. 유전적 '결정'이 최종적인 것, 즉 절대적으로 비가역적인 것이라고 한다면(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 오류에 빠지기 쉽다. 실제로 유전자는 통계적 의미에서만 행동을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저녁놀이 진 하늘은 양치기의 기쁨'이라고 하는 일반화는 좋은 비유가 된다. 붉은 저녁놀이 다음 날 날씨가 맑다는 징조라는 것은 통계적 사실일지 모르지만 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후가 많은 요인에 의해 매우 복잡한 형태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일기 예보도 틀리게 마련이다. 그것은 통계적인 예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붉은 저녁놀이 내일 날씨를 반드시 좋게 만든다고,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핵심은 '통계적 사실'이다. 손잡이 달린 컵 모양 패턴이나 호재와 악재를 가르는 공시, 장기투자 신화 같은 것들도 통계적 의미에서만 진실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신화들을 이야기할 때 대체로 짧은 기간이나 소수의 표본을 대상으로 도출된 결과를 두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도출된 '과학적' 결과는 세계 곳곳에서 신화를 만들어내고 연금술을 배우도록 부추긴다. 투자는 과학이 아니지만 말이다. 



< 3 >

가격과 가치_2021.09.13(월)


 주식시장이 열려 있는 동안 가격은 실시간으로 반영된다. 정확하며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반면 가치는 2분기 재무제표를 3분기에 확인하여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비직관적인 동시에 부정확하다. 시장 참여자들 간에 합의된 결론, 즉 가치 방정식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과 동떨어진 가정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잘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가격에 비해 가치는 여러모로 결함이 많은 존재인 것 같다. 우리는 가치를 왜 쓰는가? 


 적정 가치는 단지 편리한 기준점일 뿐인가? 적정 가치가 20,000 원인 주식을 10,000 원에 매수해서 파는 것처럼 말이다. 애석하게도 '목표가'라는 녀석이 적정 가치를 대신해 그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문제는 없어 보인다. 적정 가치가 20,000 원인 주식을 10,000 원에 매수하여 기다리는 것과 목표가가 20,000 원인 주식을 10,000 원에 매수하여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말장난인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목표가는 100% 주관적인 반면, 가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치를 통해 분석하기 때문에 비교적 '덜' 부정확한 것이라고." 또 하나의 차이는 적정 가치는 현재가보다 낮은 가격으로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지만 목표가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가격이 20,000 원 하는 주식의 적정 가치가 10,000 원이라는 말은 '고평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현재 가격이 20,000 원 하는 주식을 두고 "목표가는 10,000 원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차이 때문에 적정 가치와 목표가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하여간 내 궁금증은, 우리가 '가치'라는 것을 왜 쓰는 것인지에 대해서다. 


 가치를 계산할 때는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 부채, (앞으로 벌어들일 것을 포함한) 이익, 무형의 가치, 유형자산 등이 포함된다. 가격은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를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A 주식을 10,000 원에 산다는 말은 "이 주식을 10,000 원보다 비싼 가격에 팔 것이다"라는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 12,000 원도 좋고, 20,000 원도 좋다. 30,000 원에 팔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가격은 시장 참여자들의 기대심리에 따라 움직인다. 군중이 A 주식의 적정 가격을 20,000 원으로 기대하고 있다면 A 주식은 20,000 원 근처까지 상승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20,000 원까지 상승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분명히 20,000 원에 도달하기 직전에 '배신자'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20,000 원까지 상승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이론상 그들은 A 주식을 20,000 원에 매도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주식의 상승을 이끈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대량의 매도 주문을 낸다면 주가는 폭락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군중보다 약간 싸게 매도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중이 얼마의 가격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모든 군중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수집할 수 있다면 모를까. 


 사람들은 판단을 내릴 때 준거점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가령 당신이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자주 먹는다면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동네 카페의 커피 가격은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질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카누 같은 스틱 커피를 즐겨 먹는다면 동네 카페에서 판매하는 커피 가격도 상대적으로 '비싸게' 느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주식을 살 때 해당 기업이 10년 뒤에 벌어들일 이익까지 가치 평가에 반영한다고 해보자. 그 기업의 전망이 밝다면 계산 결과는 상당히 낙관적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에 특히 시장이 호황일 때 당신의 포트폴리오는 주식으로 넘치게 될 것이다. A도 좋고, B도 좋고, C도 좋아 보인다. 어쩌면 인덱스 펀드에 가입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당신이 기업을 평가할 때 '청산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해보자. 아마도 이 기준을 만족하는 기업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준이 엄격할수록 당신의 포트폴리오는 더 적은 수의 주식만이 포함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기 종목'은 매수 후보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만다. 어떤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을 보태자면, 평가 기준이 엄격할수록 더 적은 주식만을 포트폴리오에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실수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미래 이익을 끌어 쓰는 이들의 포트폴리오는 임상 실험도 마치지 못한 제약/바이오 주식이 넘쳐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산가치만을 고집한다면 우리가 살 수 있는 주식은 거의 없기 때문에 포트폴리오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중간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가치는 이런 의미에서 유효한 것으로 판단된다. 목표가는 투자자의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판단을 내릴 때 적절한 기준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10,000 원에 매수한 주식의 목표가가 20,000 원이었는데, 이 주식이 5,000 원으로 하락한 직후 목표가가 7,000 원이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는 연금술로 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던 중세의 연금술사 혹은 점성술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성술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치는 쉽게 변동하지 않기 때문에 한동안 쓸 적절한 준거점으로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포트폴리오에 포함되어 있는 티씨케이는 2년 전 처음 매수한 이후 내가 생각하는 적정 매수 가격 범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물론 가격은 엄청난 변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목표가를 준거점으로 삼았다면 지금쯤 150,000 원이나 200,000 원으로 기준이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한다(티씨케이의 가격이 200,000 원을 넘었을 때는 250,000 원으로 목표가가 변경되었다가 200,000 원 밑으로 떨어지면서 '200,000 만원만 회복하면 팔아야지' 하는 식이다).


 만약 이런 기준이 없거나 불분명하거나 심하게 변동되고 왜곡된다면 아마도 일관된 의견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런 일에 시간과 정신을 너무 많이 할애한 나머지 다른 중요한 일에 적절한 투자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준거점은 단지 판단을 용이하게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앵커링은 분명히 편향이다. 많은 오류를 야기한다. 하지만 적절히 사용한다면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나는 '목표가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적정 가치를 구하지 않고 '적정 매수 가격 범위'만을 구한다. 그리고 상황과 원칙에 따라 비중을 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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