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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야 May 13. 2022

Netflixed: 넷플릭스 당하다

MEMO - 5

2022.05.10(화)_Netflixed 


 'Netflixed' 직역하면 '넷플릭스 당하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놀라운 혁신으로 기존 비즈니스 모델이 붕괴되었을 때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단어를 가장 잘 사용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블록버스터가 넷플릭스 당했다(Blockbuster was netflixed)"이다. 그러나 이제 혁신의 아이콘인 넷플릭스가 넷플릭스 당할 차례가 되었다. 


 현재 글로벌 OTT 시장은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 넷플릭스가 최근 실적으로 증명했듯이 단순하게 구독자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답은 '구독료 인상'이다. 그러나 후술 할 이유 때문에 구독료를 인상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우선 전염병과 전쟁 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있지만, 전망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의 지갑은 계속 닫혀갈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넷플릭스의 구독료는 충분히 비싸다는 것이다. 미국 기준 넷플릭스의 월간 구독료는 각각 $9.99, $15.49, $19.99이다. 반면 경쟁사들의 월간 구독료는 가장 비싼 요금이 $15를 넘지 않는다. Apple TV+는 월 $4.99에 6명이 동시접속 가능하고, Amazon의 prime video는 월 $5.99 수준이다.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MARVEL 등의 IP를 가지고 있는 Disney 조차 가장 비싼 요금제는 월 $7.99이며, 월 $12.99 달러를 내면 훌루와 ESPN+까지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플릭스가 다시 구독료를 인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시장의 부정적인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넷플릭스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 넷플릭스는 해답으로 수익모델을 변화시키겠다고 선포했다. 광고 요금제를 출시하고, 한 번에 몰아서 올리던 드라마를 쪼개 올리고, 계정 공유를 금지시키고, 커머스를 활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세계 최고의 기업이 이런 형편없는 대안을 내놓는다고? 믿을 수가 없다. 


 넷플릭스는 본질적으로 실리콘 밸리와 할리우드가 결합한 회사다. 기술을 바탕으로 고객의 패턴을 알고리즘화 시켜 고객들에게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고객 경험'을 가장 중시한다는 이념 아래 세계 최고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하는 행동은 넷플릭스를 최고로 올려놓은 원칙을 모조리 깨부수겠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Netflix was Netflixed(넷플릭스는 넷플릭스 당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초초해 보인다. 구독자 수 증가가 임계점에 도달했으니 어떻게든 매출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하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어디로 갔는가? '고작' 오리지널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 터무니없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계정 공유가 금지된 넷플릭스를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 월 $7.99 달러를 지불하고 MARVEL과 NATIONAL GEOGRAPHIC을 즐기는 편이 더 현명해 보인다. 구독료 중심의 수익 모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고객 경험'을 포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들은 겸손해져야 한다. 인플레이션 시대에 가장 먼저 구독을 해지할 만한 서비스 목록 가장 위에 있는 것이 넷플릭스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과도하게 비싼 구독료도 문제다. 그들은 적어도 Disney+와 비슷한 수준으로 구독료를 인하시켜야 한다. 구독료 중심 수익 모델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그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경쟁사들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구독료를 낮추면 매출액이 크게 감소할 우려가 있지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광고 요금제를 무료 혹은 1달러 수준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광고료로 감소한 매출을 일정 부분 충당하는 동시에 구독자 이탈을 일정 부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너지고 있는 성을 다시 세우기에 부족하다. 현재 구독자 수가 감소하는 것은 간신히 막았지만 매출액이 하락하는 것은 막지 못한 상황이다. 이때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이 바로 '계정 공유 금지'다. 기존 구독료를 크게 인하하고 저렴한 가격에 광고 요금제를 출시한 이후 이 방법을 사용하면 소비자의 반발은 기존보다 크게 줄어들 것이다. 기존에 3명이서 $15.99 요금제를 각각 월 $5 수준에 사용했다면 구독료를 6달러로 낮추고 계정 공유를 금지하는 것만으로도 매출 상승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광고를 보는 대신 월 1달러에 판매되는 광고 요금제를 사용함으로써 매출이 감소할 리스크는 여전히 존재한다. 보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광고비 만으로는 이를 충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그들이 감내해야 할 것이다. 다행인 점은 1달러에 넷플릭스를 즐기던 사람들이 인플레이션 압력이 감소함에 따라 어느 정도 여유로워진다면 다시 월 6달러를 지불하는 고객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약간의 동기가 부족하다. 


 수익 모델을 변화시키기 위한 마지막 퍼즐은 '커머스'이다. 정확히는 고객 경험을 중시하는 넷플릭스만의 커머스다. NFT와 유사한 방식을 차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매달 6달러를 지불하는 고객들에게 광고 요금제를 사용하는 일반 고객들 대비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것이다. 블록체인 위에서 운영되는 기업이라면 '토큰'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넷플릭스에게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세계적으로 흥행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기반으로 여는 축제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초대장을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커머스는 이때 적절하게 활용이 가능하다. 가령 오징어 게임과 관련된 행사를 연다고 상상해보자. 고객 경험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른 기업들을 광고해 주면서 행사비를 충당하는 동시에(행사의 메인 음료로 코카콜라를 쓴다던지 하는 식으로) 관련 굿즈를 판매하여 매출을 발생시키고, 고객들에게 오리지널 콘텐츠와 관련한 다양한 행사 참여를 유도하면서 고객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심어줄 수 있다. 사정상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중계되는 YouTube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할 수도 있고, 다음 행사에는 꼭 참여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다. 버크셔 주주총회가 주주들의 '축제'인 것처럼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고객과 기업의 소통의 장인 동시에 축제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위의 방법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검증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문제점을 잠시 뒤로 미뤄두더라도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그들은 왜 복잡하게 할까? Disney에는 MARVEL을 사랑하는 팬들이 있듯이, 넷플릭스에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콘텐츠를 즐기는 팬들이 있다. 이것은 OTT 기업에게 막강한 해자이다. 넷플릭스를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고객 경험보다 중요한 것이 넷플릭스에게 새로 생긴 것일까? 내가 알던 넷플릭스는 어디로 갔을까? 리드 헤이스팅스는 어디로 갔을까? 



2022.05.05(목)_우리가 다윈 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우리 중 대다수는 양자론이나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론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아인슈타인주의'와는 달리 다윈주의는 무지한 비평가들의 좋은 표적이 되는 것 같다. 자크 모노가 잘 꿰뚫어 보았듯이, 다윈주의와 관련된 고충 중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다윈주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다윈주의는 너무나 단순한 이론이어서, 어떤 사람은 물리학과 수학에 비교하면 유치할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요약하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다윈주의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윈주의가 단순하다는 믿음이 거짓이라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뉴턴의『프린피키아』가 발표된 지 300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측정한 지 2,000년이 지나 19세기 중엽에 다윈과 월리스가 그 이론을 생각해 낼 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어떻게 그처럼 단순한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 흄,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사상가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것을 간과한 수학자와 철학자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그런 강력한 이론이 아직까지 대중들의 의식 속에 흡수되지 못했을까?


 인간의 두뇌는 마치 다윈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게, 그리고 믿지 못하게 특별히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종종 '맹목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과장되는 우연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다윈주의를 공격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윈주의는 무작위적인 우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잘못된 생각으로 다윈주의를 반박하려는 어처구니없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생물이 지닌 복잡성은 우연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다윈주의를 우연과 동격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을 반박하기란 분명히 쉬울 것이다. 우리가 다윈주의를 믿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뇌가 진화가 일어날 만큼 긴 '시간 척도'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사건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초, 몇 분, 몇 년, 기껏해야 몇십 년 만에 완결되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다윈주의는 사건 진행 속도가 너무나 느려서 완결되려면 몇만 년, 몇백만 년이 걸리는 작은 과정들의 누적에 관한 이론이다. 그럴 것 같다는 식의 직관적인 판단은 잘못된 것임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잘 조율된 회의론과 주관적인 확률론은 크게 빗나간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얄궂게도 진화 그 자체에 의해) 몇십 년이라는 일생 동안에만 작동하도록 조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익숙한 시간'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의 두뇌가 다윈주의에 저항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 다음 이유는 인류가 창조적인 설계자로서 거둔 찬란한 성공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과학 기술이 거둔 위업과 예술 창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복잡하고 고상한 것은 미리 계획되어 정교하게 설계된 결과라는 생각에 푹 젖어 있다. 과거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신에 대한 믿음에 사로잡히게 된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다윈과 월리스가 그 이전의 모든 직관에 반대해서, 원시적인 단순함으로부터 '복잡한 설계'가 만들어지는 데에 독자들도 알고 있는, 훨씬 더 만족스러운 다른 한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아낸 것은 크나큰 상상력의 비약이었다. 그 상상력의 비약은 너무 큰 것이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듯하다. 



2022.05.06(금)_어닝 서프라이즈


 대외 요인으로 가격이 단기적인 저점을 찍고 반등하여 완만하게 상승하는 주식이 있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직후 이 주식은 직전 고점을 돌파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기업이 실적을 발표하고 '어닝 서프라이즈'였음이 드러난다. 놀랍게도 다음 날부터 이 주식의 가격은 하락한다.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예시로 든 이유는 얼마 전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적적인(그러나 형편없는) 논리를 독자들에게 펼친다. 그러곤 결론에 이렇게 적는다. "어닝 서프라이즈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급락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실제 가치와 주가의 괴리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주가가 조금 더 하락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공격적으로 매수해야 합니다."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앞선 물음으로 내기를 한다면 나는 '있다'는 쪽에 자신 있게 베팅할 것이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럴싸해 보이는 말이지만 그의 말속에는 한 가지 놀라운 가정이 숨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닝 서프라이즈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급락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실제 가치와 주가의 괴리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위의 두 문장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락 전 상승하던 가격을 '실제 가치'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투자자라면 누구나 기업의 실제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평가자의 주관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온다). 적어도 그는 숙제를 한 셈이다. 


 백 번 양보해서 그가 말한 가치가 '합의된 가치'라고 하자.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 즉 대다수의 시장 참여자들이 사고파는 것을 동의하는 가치 말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모순적이다. 균형점에서는 가격 변동이 없어야 하는데(시시각각 바뀌는 참여자들의 심리를 고려했을 때 약간의 변동만 있어야 하는데), 그의 주식은 저점까지 하락한 후 화려하게 직전 고점을 돌파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지만, 아마도 그는 단순한 직관적 논리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령 '어닝 서프라이즈가 일어났는데 주가가 하락했다면 주식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다'같은 일차원적인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내린 결정일 것이다. 그는 왜 다른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실적이 주가에 선반영 되어 가격이 오르고 실적이 발표된 이후 주가가 하락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기관 투자자나 세력들이 미리 알고 선취매를 했다는 결론까지 이를 수 있다. 적어도 두 번째 문장을 빼면 좋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라면 '제가 생각하는 적정 가치와'라는 말을 덧붙였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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