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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rianne R Feb 28. 2024

반컵의 물

엄마 둘, 남매 하나 <엄마가 둘이나 있네, 아빠가 하나도 없네>

유튜브 채널 ‘피식 대학’에 박정현이 나왔다.

"엄청난 슈퍼스타이신데 팔로워가 13,000명 밖에 안되네요."라는 진행자의 말에 "와우 벌써 13,000명이나 된다고요! 멋진데요!"라고 대답한다. 곧이어 또 다른 진행자가 앞에 있는 유리컵의 물 잔을 들어 올려 "컵에 물이 반이나 차 있네" 라며 긍정성을 대표하는 관용어를 끌어낸다. 그 한마디로 상황이 웃음으로 환원되는 동시에 게스트의 낙관적인 태도가 한층 더 돋보이게 됐다. 이 영상에는 '그리스도적인 생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어느 기독계정에서 재생산된 짧은 영상이었다. 알고리즘의 추천대로 소비한 영상이지만 꽤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현, 긍정성, 교회와 개그. 관심 있는 주제가 다 들어있는 영상이었다.


ㅎㅎ



아빠는 없지만 엄마가 둘


“우리는 왜 아빠가 없어?”

"우리는 아빠가 없는 가정이야. 대신 엄마가 둘이야." 첫 아이가 세 살이 되자 물어오기 시작했다. 예상질문이 나왔다. 긴장했지만 준비해 둔 대답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잠잠해졌다.


아직 어른의 손이 많이 필요한 어린이집의 풍경에는 선생님과 함께 엄마, 아빠들의 모습도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어떤 아이는 유난히 엄마를 따르고 어떤 아이는 아빠를 더 따르지만 대부분은 엄마를 자신과 분리하지 못할 정도의 평범한 수준의 애착에서 조금 벗어난 상태에서 어린이집에 입성한다. 입학 초기에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내려놓고 오는 것이 큰 감정소모인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 일 년 내내 원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도 목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아빠들은 상대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적은 편인 것 같고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주양육자' 호칭에서 멀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참여도와는 별개로 헤테로 가정이 다수이고 기본값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다수의 가정을 보면서 '우리는 왜 아빠가 없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난 엄마가 두 명이나 있는데


사람들의 이동이 적은 편인 이 동네에 있다 보면 오래전 언젠가 함께 플레이 데이트를 했거나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 부모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아내의 회사에서 떠나는 장거리 단체 여행은 연락이 뜸하던 가족들과 친목을 다지거나 그동안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중 하나이다. 어릴 때부터 봤던 그 아이들은 분명히 초등학생 정도 되는 나이였는데. 어린 시절의 흔적만 남긴 채 나보다 키가 훨씬 더 자라 있는 것을 보면서 십 년이라는 시간을 길이로 바꾸어 가늠해 본다. 플로리다의 따듯한 바람에 펄럭이는 아이들의 치맛자락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폭으로 펄럭였다. 바람에 너울거리는 드레스에 한 뼘도 채 되지 않던 한 살짜리 드레스 길이를 빼면 십 년을 길이로 계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님쪽의 따듯한 바람을 맞으며 오래된 이야기를 나눴다


발레리는 아이 셋을 우리와 같은 어린이집에 보냈었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른 아이들과의 에피소드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나요? 엄마한테 애착이 유난한 애 있었잖아요 알렉스라고. 어느 날 알렉스가 어린이집에서 난 엄마를 너무 사랑한다고 했다나 봐요. 그런데 그 집 딸이 씩 웃으면서 난 엄마가 둘인데!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던지. 두 분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알겠더라고요.” 너무 오래돼서 잊고 있었지만 그랬던 적이 있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자면 이렇다.

아이들에게는 식구가 많고 쪽수가 많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수의 친척이 있는지를 두고 하는 입씨름이 점점 격렬해지다가 자기도 모르게 나도 엄마가 두 명이라는 허세를(?) 부리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엄마가 둘인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싶다면 그럴 수도 있다. 생각의 전환은 타인과 함께 훨씬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반컵의 물을

어떻게 바라볼지가 우리 아이만의 주제가 아니게 되는 과정이 새롭다.

어린이집에서 갔던 field trip. 아이들만의 방법으로 멀리를 내다본다.


우리는 왜 아빠가 없어?


물이 반컵이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다면 반컵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다. 첫 아이만 있을 때는 레즈비언 커플 가족들과 자주 플레이데이트를 가졌다. 아이가 없는 레즈비언 친구들이라도 집에 초대해 모임을 하거나 식사자리를 함께 하는 일도 잦았다. 아이가 하나이고 아직 유치원생이고 방과 후에 배우는 과목도 없으니 누군가와 약속을 잡는 일이 쉬웠다. 둘째가 태어나고 12개월이 될 때쯤 미국에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끝날 무렵까지 첫 아이가 다녔던 어린이집에 보냈지만 부모라면 언제든지 누구나 출입이 가능했던 예전 같은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코로나가 끝나고 둘째가 드디어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니 첫 아이가 방과 후와 주말에 하는 활동이 현저히 늘어 있었다. 같은 환경에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둘째는 일반사회 속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전형적인 학교-방과 후 활동을 오가다 동네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정도의 사회활동이 이어졌다. 이런 것을 일반사회라고 이름 붙여 요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


둘째는 유난히 나에게 애착이 컸고 오랫동안 아내를 적대시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내를 밀어내는 경향이 있었고 그게 꽤 오랫동안 지속 됐다. 생각해 보면 4년 반 정도 그랬던 것 같다.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기 시작하자 점점 나아졌지만 실제로는 아내에게 꽤 상처가 됐다.

어느 날 네 살이던 둘째는 아주 큰 소리로 성토했다. “왜 우리는 아빠가 없는 거야! 나도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미안했다. 아빠를 구해줄 수 없어서 미안한 게 아니었다. 다양한 가족 형태에 충분히 노출시키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그동안 너무 안심하고 있었다. 첫째가 두 엄마와 헤테로 가정의 모습을 동시에 안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 한시름 놓는다는 게 너무 길어졌다. 뒤늦게 동성 커플 가족 아이들과 플레이데이트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빠가 없는 가정이야. 대신 엄마가 둘이야."라는, 더할 것도 덜 할 것도 없이 가장 간결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이 말을 반복했다. 누구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같다. 그리고 저 대답이 그때도, 지금도 나의 최선이다. 아이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 있다.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눈앞에 있을 때 피하지 않고 대면해 대화를 이어가는 앞으로의 시간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나는 잘 되고 있는 것 같고 하나는 좀 시간이 걸리네요 “라는 말로 글을 정리하고 싶어지는 걸 보니 나는 반컵의 물을 들고 반이나 있다고 놀라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방법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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