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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rianne R Apr 11. 2024

상자대면

엄마 둘, 남매 하나 <상자대면>

조언의 방향


여성 성소수자로써 임신과 출산경험에 대해서 의견을 묻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 하지만 꾸준히 있어왔다. 대부분 결혼 적령기를 앞두고 가족과 친구들의 대화에서 부담을 느끼고 있으면서 가정을 꾸리고 싶거나 파트너의 유무와 상관없이 아이를 갖고  지인들이었다. 상황이 다양하니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크게 두 가지로 조언이 나뉘었다.


아기를 갖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에는 병원 방문과 미국 내 정자은행의 이용법 같은 일반적인 정보를 나누고(한국과 근접한 베트남과 일본까지는 배송이 가능한 상황 등)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내 양가감정도 이야기했다. 품이 많이 드는 일임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혹시라도 내가 게시하는 아이들의 귀여운 사진만 보고 아이를 갖고자 했다면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원망을 듣거나 고소를 당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sns에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즐거운 모습만 업로드하는 편이니까.


가임기가 끝나가는 것을 걱정하거나 시기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이 보이면 힘든 일은 짧게 언급하고 잘할 수 있다고 격려의 말만 전하는 편이었다. 이미 병원을 방문해 자궁의 상태를 살펴보고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들에게 격려 이외에 다른 말이 별로 필요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조언의 방향이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도 어려움을 인지하고 진지할 수 있으니까. 상황이 된다면 언젠가 아이를 갖고 가족을 이루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처럼 뭔지 모르는 채로 원한다고 해서 잘못되리라는 법도 없었다. 전문상담사가 아니지만 상담과 고민을 들어야 하는 일이 종종 생기니 성정체성을 염두한 교육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좋을 것 같았다. 아이계획에 대해서만 물을 것 같은 사람들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소수자로서의 어려움인 커밍아웃 이슈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갈등을 겪었던 시절이 오래전 기억인 만큼 예전보다 공감이 어려워진 것 같기도 했다. 요즘에는 때로 혐오보다는 지지를 더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도 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뒤늦게야 ‘아 나도 예전에 그랬었지. 그 말은 하지 말걸 그랬다’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어차피 계속 질문을 받고 조언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질 거라면 후회의 횟수를 좀 줄여보고 싶었다.




특권


마침 성소수자와 함께 하는 상담사 모임 ‘다다름’에서 주최하는 교육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성소수자의 이해’를 주제로 짜인 프로그램이었다.


첫 수업 전에 교육자료를 훑어보니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그 밖의 다양한 용어와 사례가 포함된 교육임을 알 수 있었다. 성소수자를 상담할 때 성별정체성 관련 단어 지식이 부족해 내담자와의 라포(rapport) 형성이 어렵고 상담 만족도가 떨어지는 점을 보완하고자 기획된 교육이었다. 젠더퀴어, 시스젠더, 팬섹슈얼, 그레이 로맨틱 등 생소한 용어들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이런 복잡한 용어들이 퀴어들 사이에서 쓰이는 것을 보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모유수유법, 아이의 발달상황이나 유아용품 같은 걸 검색하고 있었다. 아이가 스스로 트림을 할 수 없고 트림을 시키지 않으면 배가 아프고 토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찾아낸 방법이 잘 통하지 않으면 검색을 거듭했다. 야채를 먹이려면 보이지 않게, 골고루 먹이려면 끼니마다 생소한 음식을 한입이라도 먹도록. 사소한 일 하나하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찾아보면 의외로 아이마다 방법과 결과가 다양했다. 그릇에서 올리브오일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법, 침구류를 작게 접어 정리하는 법, 아기와 여행할 만한 장소, 손목보호대, 홀밀크 팩우유 구입처 등 돌봄과 집안 관리에 있어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래도 알면 편리하고 당장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집에 관한 지식에 비해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 용어를 알게 된다고 딱히 도움이 되는 일은 없었다. 내가 둘러싸인 일반사회 속에는 성정체성에 관한 고민이나 시름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업데이트 할 필요가 있는 분야.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특권이라던데 그 특권이 드디어 나에게도 주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상자 대면


용어 설명과 함께 상담 시에 취해야 할 태도와 관련한 익명의 상담 사례가 조금씩  덧붙여졌다. 그러자 애써 닫아 놓고 열어보지 않으려 노력했던 상자가 열리고 말았다. 상담 사례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담자들의 정황을 들으니 내가 과거에 머물렀던 상황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유난히 유쾌했지만 지금은 세상에 없는 친구들. 과거의 연인과 친구의 관계가 얽히고설켜 난감했던 일. 사회 속에서 일반적인 가족형태를 구축하며 살고 싶어 자신을 부정하기로 결심한 기억 속의 지인들. 성별 교정 후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는 친구. 부모님과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열심히 좋아하고 사랑해도 누군가는 결혼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미화된 표현 ‘시집보내다’. 세상에 이 보다 무기력한 표현이 없었다.


“아이고”

머리가 복잡해지고 한숨이 나왔다. 뭘 얼마나 더 이해하겠다고 이걸 다시 들여다보려고 하나.


강의가 끝난 새벽, 아침이 오기 전에 빨리 잠을 청해야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Sns를 켜고 화면을 이리저리 옮겼다. 벚꽃이 한창인 4월, 서울의 거리가 눈에 띄었다. 수많은 사진 속에는 언제나처럼 우는 얼굴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미나리


“영화 미나리 있잖아요. 희재언니는 아직도 미나리를 안 봤어요. 어릴 때 부모님이랑 이민 와서 고생했던 때가 생각나서 그 영환 보기 싫대요.”

친구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전했다.

창문 밖으로 맨해튼의 마천루 풍경이 펼쳐지는 집에 사는 사람에게 조차 정리되지 않은 채 현재가 된 과거가 있다. 도저히 웃으면서 팔아넘길 수 없는 과거가.


열어볼 생각이 없던 상자를 열어보다 한숨을 쉬며 생각한다. 희재 언니는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과거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 현재를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2024년


요즘은 사람들이 예전처럼 대놓고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혐오는 퀴어퍼레이드 때 반대시위에서나 볼 수 있지요. 대신 미묘한 차별인 마이크로 어그래션(micro aggresion)으로 나타납니다.

<성적지향 마이크로어그레션이 성소수자(LGB)의 심리적 디스트레스에 미치는 영향 : 내면화된 이성애주의와 성소수자 공동체의식의 조절된 매개효과>, 손현진 정남운, 2023, 한국심리학회 : 여성
성소수자들은 많은 응원과 동시에 많은 혐오에 노출됩니다. 남성, 고연령, 낮은 교육 수준, 독신, 시골 같은 요소를 갖고 있고 보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일수록 부정적인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성소수자와의 긍정적인 대인관계 경험이 인식개선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상담자의 동성애혐오반응에 관한 연구>, 서영석 등, 2007, 한국심리학회지 : 상담 및 심리치료

강의 내용 중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발전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지만 대놓고 혐오하는 상황보다는 나아진 것이니 마이크로 발전이라는 이름이라도 붙여볼까. 한국과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외부활동이 거의 없고 성소수자 친구들을 sns로만 접하는 내가 주로 강렬한 지지와 혐오를 동시에 목격하면서 어리둥절했던 것도 설명이 됐다. 성소수자와의 긍정적인 대인관계 경험이 인식개선을 돕는다면 사회 속에서 좀 더 능글맞은 이웃이 되어볼까 보다. 당장은 안 보이지만 응원도 혐오도 없는 종착역이 존재한다. 조금이라도 앞당겨진다면 모두 의미 있는 일 같다.





전문 상담사가 아닌 내가 이런 지식을 어디에다 써먹을 수 있을까. 수료증을 부적 삼아 상자 속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면, 그리고 내 과거와 성소수자 친구들의 현재를 나란히 포개볼 수 있다면, 어느 누구와의 긴 대화 후에도 이불킥 없이 후회 없는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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