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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rianne R Apr 27. 2024

아무도 안 만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엄마 둘, 남매 하나 <나와 타인과 커밍아웃>


                     나—————————> 타인
                                 커밍아웃

커밍아웃의 기본 요소. 나와 타인이라는 필수요소가 그려졌다. 둘 중 하나만 없어도 커밍아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힘들면 타인 없는 한적한 곳에 가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멕시코 칸쿤여행 나흘째.

바다와 열대식물로 둘러싸인 호텔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의 태양은 아침부터 뜨겁게 타오르다가 오후 네시가 조금 넘으면 빠르게 식는다. 식물들은 그 태양을 십분 활용해 잎사귀를 넓히는 데 하루를 쓰고 사람들은 물놀이를 하면서 그 잎사귀 사이에 사는 새들의 지저귐을 감상하며 하루를 보낸다. 호텔을 가로질러 시원하게 뻗어있는 인피니티풀 옆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누워 있으니 글이고 뭐고 아무 고민이 없다. 일상을 벗어나 남국의 언어로 말을 거는 생경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손 닿는 곳에 음식과 마실거리, 물기를 닦을 타월이 아무 때나 등장한다. 파도가 잔잔하고 물속이 훤히 비치는 블루라군에서는 아이들 발 밑으로 헤엄치는 물고기 떼도 출현했다. 수영하기에 적당한 날씨인 이곳의 하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해맑기만 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비자의 인생을 사는 시간 동안은 고민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낯선 곳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소비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요즘은 그러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오래된 나쁜 습관인 자조가 올라온다.

파도가 없이 잔잔한 라군. 오늘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문득 수많은 커밍아웃 후에 목격한 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대방의 서운한 말, 곤란한 질문, 어색한 정적과 표정을 곱씹어보면서 실수라고 생각했던 말을 교정하고 나면 남아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커밍아웃은 실수가 아니니까. 그래도 정신없는 사람처럼 계속하니 실수도 줄고 맷집도 생겼다.



아무도 안 만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커밍아웃을 실행에 옮기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건 최소한 타인과 함께 경기장 안쪽에 있었다는 뜻이다. 비평가도 아니고 관객도 아닌 자리에 선수로써 경기를 뛰고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을 확률은 없다. 한적한 곳에서 소비자의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잠시뿐이다. 경기장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했다면 우리는 좀 더 호들갑스럽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관중석이나 티브이 앞에 앉아있지 않고 ‘맞다이’ 뜨러 들어간 것에 대해서. 한적한 멕시코 여행 중 갑자기 세계뉴스가 된 민희진 디렉터의 기자회견을 들여다보며 갈등에서 도망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랑스러워졌다.



 사람없는 곳으로 가서 살 필요가 없다. 한번 싸워볼 준비만 됐다면. 오늘의 사건은 반드시 어제가 되므로. 과거로 이름 붙여지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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