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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rianne R May 08. 2024

부모님은 정말 괜찮으세요? 1

엄마 둘, 남매 하나 <첫째의 온도>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니?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벌써 한살이예요. “


인천공항, 남미 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탑승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엄마께 아이의 사진과 함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려 손에 쥔 핸드폰이 덜덜 떨렸다.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릴 때는 나를 숨기느라 바쁘고 나이 들어서는 숨기던 것들을 순서 없이 내뱉느라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한 살이 됐다. 나는 어릴 때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 인생의 어느 시점을 되짚어 봐도 성정체성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언제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이상하고 잘못된, 그럴 리 없는 일로 서둘러 정의 내리며 나를 돕던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이 어땠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가려던 길 위에서 지나야 하는 관문의 문지방을 넘는 중인 것만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먼저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남미 여행 내내 아빠께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내가 떨어뜨린 폭탄에 남미 여행 내내 잠을 설치다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아빠께 말문을 열었다.


“아드리가 이렇게 지내고 있대요.”

“걱정하지 말아. 걔는 걔 나름대로의 삶이 있는 거니까. “


아이 사진을 보여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의외로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공항의 인파를 뒤로하고 침묵이 이어졌다. 곧이어 아빠가 한마디 말을 꺼냈다.


“사진 속에서 본 나나가 저기 걸어가는 애기랑 좀 닮은 것 같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공항에서 부모님을 픽업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탄 부모님과 트렁크에 가득 찬 짐 모두 말이 없었다. 한 시간 동안 붙잡고 있을 운전대만 내 마음같이 움직여줄 뿐이었다.


“넌 그렇게 갑자기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말을 하니.”


이미 드릴 말씀을 다 드렸다고 생각하니 엄마의 볼멘소리에 별다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행 후 피곤하셨던 두 분이 잠잠해지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집에 도착하면 맞이할 아내와 아이를 앞에 두고 크게 노여워하지는 못하실 거다. 부모님 입장에서 이게 나쁜 일이라면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 아무리 귀한 그릇도 깨지고 나면 아쉬운 마음보다 치울 마음이 앞서는 것처럼.


부모님께 미리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종종 예지몽을 꾸셨다. 그리고 꿈에 나온 누군가를 염려하며 안부 전화를 하시곤 했다. 내 긴 외국생활 동안 한 번도 직접 전화를 한 적 없던 아빠가 첫째가 태어난 후 갑자기 전화를 하셨다. 아마도 심상치 않은 예지몽을 꾸신 게 분명했다. 망설이느라 집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신생아를 어르고 달래던 시간이었다. 녹록지 않을 때 전화를 받으니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다.


“.. 요새 어떻게 지내니? 별일 없니?”

“네, 잘 지내요. 별일 없어요.”


아빠의 예지몽 이야기에 코웃음을 쳐왔던 나는 그때부터 아빠의 꿈 이야기를 더 이상 믿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실 이번엔 예지몽보다 부모의 촉이란 말이 더 나은 단어일지 모르지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부모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커밍아웃이 쉬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가 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씁쓸했다.





집에 도착하니 딸과 아내가 부모님께 밝게 인사를 했다. 부모님은 아이를 보자마자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반겨주셨다.


“아이고 너무 예쁘네! “


귀여운 딸을 보고 화를 내지는 못하실 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긴장이 풀렸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집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엄마와 산책 길에 나섰다. 10월의 산책은 언제나 좋다. 비슷비슷한 이층짜리 단독 주택들이 모여있는 미국의 타운 하우스 커뮤니티를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도착할 때쯤 엄마가 말씀하셨다.


“둘째도 갖는 건 어떠니?”


갑자기 날아든 반응이 기쁘면서도 어색했다.


“그러려고요.”

“그래, 아무래도 혼자보다 둘이 낫지.”


너무 빠른 전개에 어안이 벙벙했다.



서른다섯 살. 부모님께 아이, 커밍아웃, 와이프 세 가지 선물을 함께 드렸다. 엄마는 생각보다 아내를 좋아하셨다. 가끔

집 주변을 달리는 것 이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고 커플들의 미국 생활이 다 그렇듯 퇴근 후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점을 좋아하셨다. 그리고 지금 사는 곳의 이웃들과 평이하게 지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았다. 엄마는 딸과 아내의 생일을 챙기고 우리의 한국방문을 환대하고 아내에게 가끔 안부인사도 전했다. 엄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도리를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엄마를 사람들은 참 좋아했고 아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이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신 걸까?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갑자기 마법처럼 아무런 갈등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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