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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Jan 31. 2019

본질에 집중한다는 것

하루는 출근을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인씨, 한 10시쯤에 고문님들 오실 건데 우리 마케팅 계획이랑 지금까지 전시회 나갔던 내용들 있죠. 그거 정리해서 발표 준비해놓으세요. 간단하게 하면 돼요."


'간단하게'라는 단어가 대충 하라는 말이 아닌 '본사가 나아가고자 하는 마케팅 방향성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영업의 일환으로 참가했던 전시회에서 발견한 고객 니즈와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빠르게 정리하여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임을 직감했다. 아, 뇌에 바로 커피를 끼얹을 수는 없을까.

커피 들어갑니다

회사가 기술 기반 스타트업이라 그런지 기술 및 마케팅 등 전반적인 분야에 대해 자문을 해주는 고문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이전에 대기업이나 외국계 회사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하시던 분들이 많은데, 스타트업에 각종 노하우를 전수해주기도 하고 자신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스타트업이 가려워할 만한 부분을 긁어주기도 하는 고마운 분들이다.


오기로 한 분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OO전자의 전, 현직 임원들이라고 한다. 어느덧 시간은 열 시에 가까워져 갔고, 대표의 사뭇 상기된 웃음소리와 함께 그들이 등장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을법한 푸근한 이미지의 아저씨들.

카톡 프로필 사진 등산 인증샷일 거 같고 막...

준비한 자료로 발표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기기 시연으로 넘어갔다. 회사는 헬스케어 관련 디바이스를 만들고 있었는데, 개발이 거의 끝난 제품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써보기도 하며 꽤나 만족스러운 반응이 오고 갔다. 화기애애한 웃음이 회의실을 채우던 찰나. 누군가의 눈길이 제품 포장박스로 향했다.


박대표, 저 박스 원가 얼마야?

"아 그게..."


대표가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 뒤로 넘어갈뻔한 포장 박스의 원가는 몇천 원도 아니고 몇만 원이다. 물론 박스가 좀 (많이) 비싸다는 것은 내부적으로도 공감을 하고 있던 부분이었으나, 이미 몇천 대 분량이 만들어져 있던 시점이었고 '비싸긴 해도 고급스럽잖아~'라는 의견이 꽤나 지배적이어서 별다른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원가를 듣고 난 고문님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므어야!?!!"로 포문을 연 고문님들은 거의 랩을 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내셨고, 열심히 받아 적는다고 받아 적고 있던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펜을 놓고 그 환상의 하모니에 정신을 내맡겼다.

우오오오!!!!!!!

  결국 결론은 한 가지였다. 본질에 집중할 것.

박대표. 처음이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최고로 잘 만들고 싶은 그 마음 잘 알아. 그런데 말이야. 본질이 뭐냔 말이지. 자네 생각에 사람들이 저거 사서 '이야 박스 잘 만들었네' 하고 모셔놓을 거 같아? 아니라고. 그럼 뭐겠어. 제품 싸고 있는 박스에 돈을 쓸게 아니라 고객이 돈을 내고 사가는 제품 자체의 퀄리티를 높여야지. 삼성이고 LG고 수백만 원짜리 핸드폰, 세탁기, 냉장고 포장박스 한 번 생각해봐. 거기에 돈을 얼마나 쓸 것 같아? 지금 제품 보니까 여기 이 찍찍이, 어 벨크로. 이거 몇 번 하면 다 마모돼서 못 써. 차라리 박스 원가를 줄이고 이 부분 퀄리티를 높여보라고. 고객이 원하는 건 아주 좋은 박스가 아니라 아주 좋은 제품이란 말이야.

그 밖에도 고문님들은

고객들이 우리 제품에 얼마나 가치를 느낄지 생각하라

이 제품을 남이 아니라 내가 쓴다고 생각하라

고객이 실제로 이 제품을 사용 후 어디에, 어떻게 보관할 것인지 생각해보라

현재 시중에 나와있는 전자제품들이 가격대별로 어떻게 포장하고 있는지 알아봐라

포장이 아니라 제품의 퀄리티를 높여라

등과 같은 다양한 팁을 주셨다. 물론 포장 제조에 잔뼈가 굵은 업체를 소개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R&D와 영업 분야에서 수십 년간 전문가로 일해 온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고객.

회사는 회사의 존재 이유와도 같은 고객에게 어떠한 가치를 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며, 그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참으로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그렇기에 쉬이 간과할 수도 있는 것. 그렇다면 회사를 떠나서 나는?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며, 내가 추구해야 할 본질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동안 멍하니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은 "자 그럼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하는 대표의 목소리였다. 미팅 끝났구나 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빙그레 웃으며 "발표한 친구도 같이 가지?" 하는 고문님. 장난이구나 싶어서 하하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는데, 대표가 소리친다. "정인씨 빨리 나와요."


잠깐만, 나 여기 따라가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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