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피셜로 하는 거 아님
투자사 리스트업 하는 과정을 빼먹을 뻔했다. 펀드레이징을 하기로 결정한 이후, 우리는 원하는 프로필의 투자사를 추려보기로 했다. 다양한 관점과 기준에서 우리가 원하는 투자사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결국 전혀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투자유치로 무엇을 목표하고 있는지, 그 목표를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일단 그럼 투자사 롱리스트를 먼저 만들어보라는 작업이 나에게 떨어졌다.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답게 구글에 'top SaaS VC investors'이니 뭐 이런 검색어를 넣어보며 한 30개 정도의 투자사를 추려서 상사에게 가져갔다.
당연히 상사는 보자마자 "이거 쓰레긴데요?"
GPT로 뽑았어야 했나 하고 동공 지진 하고 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롱리스트라면 무릇 comprehensive, 포괄적이어야 하는데 내가 요런 투자사면 좋겠지 하면서 뇌피셜로 긁어온 투자사 30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면서 보여주신 게 크런치베이스*로 투자사 리스트를 엑셀로 뽑는 것이었다. 원시인이 불을 접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30분 전의 내 모습에 엄청난 자괴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크런치베이스: 기업 데이터베이스 플랫폼. 웬만한 회사는 다 등록이 되어 있고, 직원수, 매출 등의 기본적인 정보부터 누가 어디에 투자를 했고, 투자 이력이 어떻게 되는지 등 다양한 정보들을 볼 수 있다.
다만 comprehensive 하다고 해서 크런치베이스 올라와있는 수천 개의 투자사를 다 뽑아서 보는 그런 짓을 우린 하고 싶지 않으니 기준을 정했다. 이 기준은 추후 숏리스팅을 하기 위한 우선순위 선정에도 사용된다.
1. 지역: 우리는 미주와 유럽 시장 중심으로 영업을 하고 있으니, 그곳에 네트워크가 많은 투자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순위는 미국, 2순위는 유럽 베이스로 잡았다.
2. 주요 투자 섹터: 소프트웨어업에 투자를 주로 하는 곳과 소통을 하는 것이 결이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투자사 중에 괜찮아 보이는 곳이 있더라도 주요한 투자 섹터가 '바이오'라면 우리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3. 우리 회사와 유사한 업종에 투자한 이력: 주요 투자 섹터와도 연결되는 부분인데, 섹터 안에서 우리와 비슷한 업종의 회사에 투자한 이력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런 곳이라면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나 고객,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투자사의 타입이 무엇인지 --> VC인지 PE인지 CVC인지 타입에 따라 투자사의 성격이 달라짐
아시아 지역에 투자한 경험이 있는지 --> 한국 회사라고 하면 바로 투자가 어렵겠다고 하는 글로벌 투자사들이 있음
보통 어떤 스테이지의 회사에 투자를 진행하는지 --> 예를 들어, 우리는 시리즈 B로 XX 정도의 금액을 희망하는데 투자사는 주로 Seed 라운드에서 훨씬 적은 규모로 진행한다고 하면 핏이 맞지 않음
등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필터링을 했다.
수천 개에 달하던 리스트가 200여 개 정도의 투자사로 추려졌고, 이제 여기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1부터 3까지의 기준에 몇 개나 충족하는지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기니 숏리스트까지 자동으로 완성되었다.
리스트업도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