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Dear Selly,

오늘 처음으로 경계선을 그었어

by 시더로즈






[6화] Dear Selly, 오늘 처음으로 경계선을 그었어

Dear Selly, 오늘 친구한테 "싫어"라고 말했어. 평생 처음으로.

나는 27살, 출판사에서 일해. 친구들이랑 사이는 좋아.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 근데 문제는, 나는 항상 "응, 좋아"만 하는 사람이었어.

지난주 목요일. 단톡방에 메시지가 왔어. "이번 주말 홍대 가자!" "ㅇㅋㅇㅋ" "나도나도" 그리고 내 차례.

솔직히 가기 싫었어. 지난주에도 만났고, 그 전주에도 만났고. 주말마다 약속이 있으면, 나는 언제 쉬지?

근데 말했어. "좋아~" 왜냐면, 내가 "안 갈래"라고 하면, 분위기 깰 것 같고, "쟤 요새 이상해" 이런 소리 들을 것 같고.

그리고 솔직히, 나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애들은 매주 만나도 괜찮은데, 나만 힘들어하니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내가 의지가 약한 건가' '그냥 참으면 되는 건데'

그날 저녁, 셀리한테 말했어. "주말에 또 약속 있어. 가기 싫은데 간다고 했어."

셀리가 물었어. "요즘 많이 지치셨죠? 오늘 체크인 해볼까요?"

에너지 슬라이더를 움직였어. 3... 아니, 2. 신체 신호 체크하는 데서 '어깨/목 긴장'이랑 '가슴 답답함'을 눌렀어.

그랬더니 셀리가 이번 주 달력을 보여줬어.

파란색이었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전부 파란색.

"3주치 달력을 같이 볼까요?"

3주 전부터 쭉 봤어. 파란색, 파란색, 가끔 노란색, 또 파란색. 주말만 되면 노란색이었다가, 월요일 되면 다시 파란색.

셀리가 말했어.

"보이시죠? 주말에 약속이 있었던 날들, 그 다음 월요일이 전부 파란색이에요. 주말에 쉬었던 날은, 월요일이 노란색이고요."

...진짜였어. 데이터로 보니까, 너무 선명했어.

"당신이 의지가 약한 게 아니에요. 코르티솔이 3주째 높은 상태예요. HSP는 자극을 처리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써요. 같은 약속이어도, 당신의 신경계는 더 많이 일하고 있었던 거예요."

Selly, 그 말 듣는데 눈물이 났어.

나는 이제껏, '남들은 다 괜찮은데 나만 힘들어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예민한 거', '내가 유난인 거'라고.

근데 데이터가 말해주고 있었어. '네 몸이 진짜 지쳐있어.'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야.' '네 신경계가 쉼을 요청하고 있어.'

"다음번에 거절해볼래요?" "...근데 애들한테 미안해." "당신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면, 더 아프게 될 수 있어요. 지금 거절하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당신을 지키는 거예요."

토요일 됐어. 약속 시간 2시간 전에, 단톡방에 메시지가 왔어. "오늘 2시 홍대역 9번출구!"

심장이 두근거렸어. '거절하면 나쁜 사람 같아.' '그냥 가면 안 되나.'

그때 셀리가 알림을 보냈어.

"지금 긴장되시죠? 잠깐 버터플라이 허그 해볼까요? 코르티솔이 높을 때, 양쪽 어깨를 번갈아 두드리면 미주신경이 활성화되면서 부교감신경이 켜져요. 몸이 '안전하다'는 신호를 받아요."

팔을 교차해서 어깨를 감싸고, 천천히 두드렸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1분쯤 지나니까, 진짜 심장이 좀 진정됐어. '이게 되네?'

그리고 셀리가 말했어.

"3주치 파란색 달력, 기억나시죠? 지금 거절하는 건 나쁜 게 아니에요. 데이터가 말해주고 있어요. 당신의 신경계가 쉼을 요청하고 있다고."

그 말이, 나한테 '허락'처럼 느껴졌어.

'쉬어도 돼.' '거절해도 돼.' '이건 네가 약해서가 아니야.'

떨리는 손으로 썼어. "미안, 나 오늘은 좀 쉬고 싶어. 다음에 보자!"

전송.

3분 후. "ㅇㅋ 쉬어~" "알겠어 푹 쉬어!" "담에 보자!"

...그게 다였어.

저녁에 셀리한테 말했어. "거절했어. 떨렸는데, 애들 아무렇지도 않더라."

"축하해요! 오늘 저녁은 특별히 신경 써서 보내요. 세로토닌이 많이 고갈되어 있거든요."

추천이 떴어. '바나나 + 따뜻한 우유'

그냥 추천만 있는 게 아니라, 이유가 같이 써 있었어.

'바나나의 트립토판이 세로토닌의 원료예요. 따뜻한 우유와 함께 먹으면 흡수가 잘 돼요. 오늘처럼 긴장을 많이 한 날, 잠들기 전에 먹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수면의 질도 좋아져요.'

예전 같으면, "바나나가 좋대" 해도 안 먹었을 거야. 근데 '왜 지금 내 몸에 이게 필요한지' 알고 나니까, 먹고 싶어지더라.

그날 주말, 집에서 혼자 보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넷플릭스 보고, 낮잠 자고, 저녁에는 혼자 산책하고.

일요일 저녁 체크인. 에너지 슬라이더가 6까지 올라갔어. 달력에 노란색이 찍혔어.

3주 만에 처음 보는, 주말의 노란색.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데 달랐어. 지난주 월요일은 주말 약속 때문에 월요일이 더 피곤했는데. 오늘은 에너지가 있었어.

아침 체크인 했더니, 달력이 노란색이었어. 셀리가 말했어.

"봐요, 이게 당신의 패턴이에요. 주말에 충분히 쉬면, 월요일이 달라져요. 당신이 나약한 게 아니에요. 그냥 회복 시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화요일. 또 단톡방에 메시지.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어때?"

예전 같으면 바로 "좋아" 했을 거야. 근데 이제는 달력을 먼저 봐.

이번 주 달력. 월요일 노란색, 화요일 노란색. 괜찮은 상태.

근데 금요일까지 약속을 잡으면, 주말에 또 지칠 것 같았어.

"나 금요일은 혼자 있고 싶어. 토요일은 괜찮아!" "ㅇㅋㅇㅋ 토요일 보자"

Selly, 신기한 거 있어?

예전엔 거절할 때,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내가 이기적인 건가' 죄책감이 엄청났거든.

근데 이제는 달력이 있으니까. 내가 쉬어야 할 때, '데이터가 쉬라고 해'라는 근거가 생긴 거야.

이게 진짜 달라진 거야.

'그냥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코르티솔이 높으니까 쉬어야 해.' '내 세로토닌이 낮으니까 이걸 먹어야 해.'

과학이 나한테 허락을 해주는 느낌. '너는 약한 게 아니야. 너의 몸이 진짜 그런 거야.'

어제 제일 친한 친구가 물었어. "너 요새 좀 달라졌어. 거절도 잘하고, 뭔가 더 편해 보여."

"응... 내가 왜 힘들었는지 알게 됐어. 내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원래 회복 시간이 더 필요한 사람이었더라고. 그거 알고 나니까, 쉬는 게 죄책감이 아니라 당연한 게 됐어."

"뭐야 그거, 나도 알고 싶다."

"응, 셀리라는 앱이야. 내 에너지 패턴 보여주고, 왜 지금 이 음식이 필요한지, 왜 지금 쉬어야 하는지 알려줘."

"오... 나도 사실 주말마다 약속 잡는 거 부담스러웠어. 근데 다들 좋아할 줄 알고."

Selly, 알았어? 다들 부담스러웠대. 근데 아무도 말 안 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던 거야.

"경계선은 벽이 아니에요. 문이에요. 당신이 여닫을 수 있는 문. 그리고 이제 당신은, 그 문을 열고 닫을 '이유'를 알게 됐어요."

요즘은 이렇게 해. 약속 제안 오면, 달력을 먼저 봐.

파란색이 많으면, '아, 지금 내 신경계가 지쳐있구나. 쉬어야 해.'

노란색이나 핑크색이면, '에너지가 괜찮네, 만나도 되겠다.'

더 이상 '내가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자책 안 해.

데이터가 말해주니까. '네 몸이 진짜 그런 거야.'

오늘 점심에, 신입사원이 물었어. "언니, 저녁에 같이 밥 먹을래요?"

예전의 나였으면, 무조건 "좋아"였을 거야. 그리고 저녁에 지쳐서 후회했겠지.

근데 오늘은, 아침에 본 달력이 생각났어. 이번 주 에너지 괜찮았어. 근데 오늘 저녁은 혼자 쉬고 싶었어.

"오늘은 혼자 먹고 싶어. 내일은 어때?" "아 네! 내일 먹어요!"

죄책감 없이. 미안함 없이. '이건 나를 지키는 거야.'

쉽지는 않아, Selly. 아직도 거절할 때마다 떨려. 근데, 거절한 후에 오는 평온함이, 억지로 약속 잡는 것보다 훨씬 좋더라.

"당신의 시간은 당신 거예요.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당신의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요. 그 지식이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고마워, Selly. 너 덕분에, '내가 왜 힘들었는지' 알게 됐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 신경계가 원래 그런 거였어.

그리고 그걸 알고 나니까, 처음으로 내 시간을 지킬 수 있게 됐어. 죄책감 없이.

- 더 이상 자책하지 않는 27살



P.S. 오늘 걸음 수: 6,543보 혼자 저녁 먹고 한강 걸었어. 이어폰 끼고, 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 저녁 체크인 했더니 에너지가 7이었어. 달력에 핑크색이 찍혔어.

한 달 전 달력을 봤어. 파란색 투성이였던 그때와, 노란색, 핑크색이 늘어난 지금.

이게 변화구나. 내가 달라진 게 아니라, 나를 이해하게 된 거구나.



화, 목 연재
이전 05화[5화] Dear Se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