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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확행 Nov 14. 2024

수능날에 김밥 싸는 엄마

널 응원하는 어떤 이웃

수능 시험 당일 새벽이다. 일찍 일어나 김밥을 싼다. 김밥 먹고 혹시나 체할까 하는 걱정은 잠시 접어 두어도 되는 중딩 아들을 둔 엄마인 나.  




수능 시험일을 기준으로 심리적으로는 한 학년 진급한다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첫째 아이는 오늘 하루 학교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 굉장히 신나 하고 있다. 등교를 해야 하는 초딩 둘째는 잠시 형을 부러워하다가, 그래도 등교 시간이 9시 20분으로 늦춰진 것만으로 나름 만족선을 찾은 것 같다.



시험 응시생 엄마도 아니면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압력 밥솥에 하얀 쌀을 씻어 안치고 김밥 거리를 준비한다. 지금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험 치는 아이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을 어느 인생 선배 언니를 상상하며.   

기본에 충실하자는 게 오늘 김밥의 주제다. 깻잎, 치즈 그리고 참치가 없어도 된다. '기본'과 '충실'이 주는 감동이 있기 때문.




김밥을 싸면서도 나의 시선은 주방 창문 바깥으로 넘어간다. 아직 해가 뜨지 않는 새벽. 결전의 하루가 시작될 아파트 뒤 고등학교에는 벌써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오늘을 위해 12년이라는 여정을 최선을 다해 완주한 대견한 아이들이 저곳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올 것이다.

학교에 불이 켜진 것만 보는데 왜 울컥하는 걸까





김밥을 한 줄 한 줄 꼭꼭 눌러 싼다. 햄과 맛살로 세운 기둥 사이로 잘게 채친 당근 그리고 어묵을 잘 채운다. 도톰하게 부쳐 길게 자른 계란을 그 위에 살포시 얹고 어묵, 연근, 단무지를 착착 쌓아 호로록 말아낸다.


난 김밥을 쌀 때 옆구리를 잘 터트리는 편이다. 김발 없이 김밥을 싸신다는 어느 분의 글을 읽고 용기를 내어 한번 따라 해 보았는데, 재료를 말아싼 김이 손에 쏙 들어와서 김밥이 더 야무지게 싸지는 것 같다. 자신감이 생긴다.


오늘의 목표는 터진 김밥 없이 완벽하게 줄을 다 싸 내는 것. 날이 날이니 만큼 실수 없이 꼼꼼하게 해 내고 마음이 커진다. 오늘 시험장에 들어가는 그들에게 보내는 나의 응원을 김밥에 담아보려는 .    


다행히 터진 김밥은 나오지 않았다. 휴우!



김밥을 잘라서 꼬다리만 한 접시에 모은다. 예쁜 김밥꽃이 피었다. 김밥꽃의 주인공인 큰 아이가 방에서 나온다. 오는 잠을 쫓아가며 숙제하는 건 아예 불가능 한 녀석은 차라리 새벽에 일어나서 설치는 편이 훨씬 나은가 보다. 수학 숙제를 마치고 나온 아이는 김밥꽃을 받아 들고 식탁에 앉는다.

김밥꽃이 활짝 피었다.




어떤 날은 화산이 폭발하듯 뜨겁게, 어떤 날은 칼날 같이 차갑고 날카롭게. 어제는 미친 듯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마주하는 너와 나.  



경험, 실수, 성취, 좌절, 체념, 인정, 믿음이 아무런 규칙 없이 혼란스럽게 휘몰 치는 있는 사춘기 파도 앞에 선 있는 너와 나.



5년 후면 너와 나도 오늘의 시간을 맞이할 텐데,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밥을 입에 넣고 오물 거리는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며 찰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칼 들고 있을 때 쓸데없는 생각 하면 손가락에서 피난다. 정신 차리자.  



눈앞에 있는 저 아이에게 애꿎은 내 걱정과 불안을 굳이 전해줄 이유는 1도 없다. 얼굴도 모르는 남의 집 아이도 김밥 싸면서 응원하는 데 말이다. 너를 단단하게 믿어주고 뜨겁게 뜨겁게 응원하기로 마음을 다 잡는다. 김밥 썰다 말고 갑자기.  





굳게 닫힌 교문 너머로 아이들의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성당에서, 교회에서, 절에서, 집에서,  회사에서. 아이들을 위해 간절히 바치는 부모님의 기도 소리도 리는 듯하다.   



너무 긴장하지 않고 차분하고 꼼꼼하게 시험지를 마주하길. 준비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두 쏟아내길. 끝까지 고민했던 두 선지 중에 네가 골랐던 번호가 정답이길.   

익명의 다정한 이웃집 아줌마가 너를 응원한다!



촉촉한 비가 쏟아지는 가을밤. 오늘 하루종일 보냈던 응원의 레이더를 다음 주 기말고사 준비로 나름 투닥거리고 있는 첫째 아이에게, 소설 쓰기 숙제로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둘째 아이를 향해 맞춘다.


차고 넘쳐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믿음과 응원은 절대 절대 아끼지 않기로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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