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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Jan 28. 2021

밤이 긴 겨울을 보내며,

[Letter Series] 친애하는 나의 H에게




잘 지내요?


How are you 보다 더 나은 말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별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누었을 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그때보다는 마음이 나아졌는지, 괜찮은지 궁금하네요.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이런 마음을 전한다는 것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나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어요. 그저 이 관계 혹은 나의 존재가 당신에게 어떻게든 이익이 되지 못하고 해가 된다면, 떠나 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당신은 굳이 그렇게까지 모 아니면 도 같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지만.


친구를 통해, 당신이 내 안부를 궁금해하더라는 이야기를 한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전히 당신의 친구와 나의 친구는 서로 친구니까요. 우리는 어떻게든 상대의 이름에 닿겠죠.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 당신의 SNS를 몰래 구경하기도 했어요. 늘 풍경사진 뿐이라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까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SNS라는 것이 원래 그렇듯이,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좋은 면 만을 포스팅할 테니까요. 그것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는 없겠죠.





이제는 조금은, 친구도, 동료도, 그 어떤 인간 관계도 유효기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자주, 그런 상황을 마주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각자의 마음은 결국 다를 수밖에 없는 건데 말이죠. 우리는 시간으로만 따진대도, 친밀함의 정도로 따진대도 오래되고 가까운 친구였다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나는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다만, 나중에 되돌아보니, 당신이 했던 말들은 자주 나를 걱정했고, 그것은 때론 경고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땐 몰랐습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매몰되어 있는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꽤 오랫동안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에 하나였고, 늘 주변 사람들을 잘 받아 주는 사람이었죠. 우리의 대화는 자주 내 마음 어느 구석의 토로였고, 그걸 들어주는 당신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더라고요. 근본적인 마음의 어떤 결핍이 있었던가봐요. 요즘에야, 깨닫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마음들은 늘 피상적이라, 의지만으로는 잘 고쳐지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늘 더 잘하고 싶었는데. 그 의지만은 분명했거든요. 그러다가도 한계의 임계점이 오면 또 결국 기대게 되는 것은 나였던 것이 문제겠지요. 대화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어쩌면 당신에게는 일방통행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면서 모른 척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당신에게 빚을 진 느낌이었어요. 커다란 빚은 아니지만 작은 것들이 쌓여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이 관계는 늘 기울어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균형을 맞춰보려 애를 썼습니다. 불안하고 힘든 날이 아니라 기쁜 날에 연락을 하고, 좋은 기운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는 것, 희망찬 마음을 북돋아 주는 일 같은. 늘 기운을 빼앗아 가는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당신이 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싫어도 싫다고 이야기하거나 피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을 통해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늘 눈치가 보였던 것 같아요. 굳이 싫다고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알아서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원하지 않는 것을 함께 하게 만드는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통과하던 중이었어요. 우리는.


그때 당신은 지쳐있었고요. 그것을 내가 마음대로 번아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삶의 의욕도 없이 무엇도 어쩌지 못하는 당신에게 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상담을 해 보는 것이나 휴직을 권유했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당신도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거겠죠. 스스로를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라 타인까지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시그널. 그런데 안타깝게도 알아채기엔 너무 미미했어요. 아니, 내가 둔했던 걸까. 신호를 보내온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저 내 식대로 당신을 도우려고 애를 썼고요. 당신은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서. 우리는 같은 문제도 같게 풀어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도, 내 방식의 해결을 권유했던가봐요. 아는 게 그것뿐이라. 오만했다고 말해야 할까요.





내가 굳이 끝까지 가겠다고 결정하면, 이 관계는 어그러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가고야 마는 사람이에요. 확인의 점을 찍지 않으면 그 애매함 사이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결국 A와 B를 선으로 나누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요. 당신은 그런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이죠. 이렇게든 저렇게든 자연스럽게 흐르게 두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 모와 도 사이에는 많은 단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 우리는 이렇게나 다른데 참 오래 시간을 함께 보냈네요.


마지막에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어요.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결국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진 빚을 다 갚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그동안 너무 고마웠고, 그걸 다 갚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그 균형이 평형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더 오래 친구일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빚을 영원히 갚지 못했을 거예요. 그 빚을 갚는 동안에도 나는 또 소소하게 빚을 졌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런 결말을 맞이한 것은 당신에게 더 나은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관계에서 가장 잘한 일인지도 모르죠. 부디, 그랬기를 바라요. 이 결정이 최소한 당신에게 더 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기를.   




우리 서로의 친구와 친구들이 서로 이어져 있는 한, 나는 언제든 당신의 이름을 또 발견할 거예요. 당신도 그렇겠죠? 이제 그 이름이 서로에게 더 이상 불편하거나 힘든 이름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과거의 언젠가는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한 마음이 가득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멀리서 옛 친구의 앞날과 건강을 기원하고 싶거든요. 왕왕 그립기도 했고요. 좋은 날이 오면, 웃으면서 한 번 만날 날이 올까요?



밤이 긴 겨울을 보내며,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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