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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Jan 31. 2021

각자의 삶을 알아서 잘 살아나가기로

[Letter Series] 내게 신뢰의 감각을 가르쳐준 D에게




우리에게 존댓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시간이 지난지 오래되어서, 막상 만나도 쉽게 편한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이 정도면, 남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그러니 안부는 묻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나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하죠. 특히 당신은 최선의 방법으로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을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아는 한,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유독 90년대를 추억하는 일에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니까, <건축학개론>을 본다 던 지, <응답하라> 시리즈를 본다던지 하는 일들 말입니다. 게다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는 밴드가 나오니까요. 동아리 생활이 생각이 나요. 가끔씩은. 


그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때도 지금처럼 한껏 섬세하고 쉽게 가라앉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당신은, 음, 우직한 사람이었죠. 그리고 나는 그 우직함이 좋았어요. 늘 동성의 친구들과만 어울리고, 세상 무뚝뚝해 보이지만, 안 어울리게 마음 한 구석에는 따뜻한 소녀감성 같은 걸 갖고 있었잖아요. 당신은 늘 스무 살인데도 서른쯤은 먹은 것 같은, 철이 일찍 든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나만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 거예요.  


당신은 겉이 단단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 껍질을 하나씩 뚫고 당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즐거웠어요. 그 안에는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니까. 나한테는 늘 그게 제일 중요했던 것 같아. 안전한 것. 위험하지 않은 것. 믿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당신은 대학생활 내내 내게 믿는 구석이었죠. 괜찮아,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소울메이트 같은 D가 있지. 하는 마음. 


우리는 맞는 것이 하나도 없는 친구였잖아요. 당신이 시골의 흙에 고집스럽게 자리 잡은 잡초 같은 사람이었다면, 나는 도시의 유리 온실을 탈출하고 싶어 발을 땅에 딛지 못하고 자꾸 어딘가를 떠돌던 사람이었죠. 같은 이야기에 동의하는 것보다는 반대하는 일 더 많았고, 싸우기도 자주 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 때문에 자주 울었어요. 좋아하는 만큼 늘 서운한 게 많았고, 당신은 늘 내 맘 같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늘 당신을 '신뢰'라는 감각으로 떠올리는 것은 사실 한 순간의 기억부터 인 것 같습니다. 선거하던 날이요.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가 얻은 한 표는 당신의 표였죠.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당신답게 무심하게 '네가 제일 잘할 것 같았다'고 짧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한 마디를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뭐랄까, 예기치 못한 사람에게 받은 굳건한 신뢰, 그런 마음은 살면서 처음 경험해보는 느낌이어서. 나에게는 신뢰가 너무 중요한 가치였는데, 그걸 누군가에게 받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많은 범죄자도 자살자도 사회적인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있잖아요. 내게는 그 한 명이 너무 소중했거든요.


당신에게는 기억나지 않는 찰나의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살면서 종종 고개를 넘기 힘이 든 날이면 그때 생각을 해요. 사람이 사람에게 심어준 신뢰의 감각. 그게 되게 좋았던가 봐. 그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 힘이 좀 나거든요. 우습죠, 사람이란 어찌나 단순한지. 


마음이 답답해질 때면, 메신저를 켜고 당신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이랑 대화하는 시간이 내게는 신경안정제 같은 효과가 있었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투정을 하다가도 덤덤하게 통화를 하고 나면 괜찮아졌어. 할 말이 궁해질 때엔 괜한 질문도 하고, 부탁도 했죠. 당신이 내 친구인 게 너무 좋아서, 늘 자랑하고 싶었어. D가 내 친구예요. 제일 친한 친구. 그때 실은 나는 당신을 잃을까 봐 다른 생각을 못했어요. 인생에 당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너무 컸으니까. 친구로 오래오래 곁에 있고 싶었거든요. 일련의 시간이 지나고,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지만. 






어느 늦은 밤, J선배와 자주 가던 학교 앞 주막에서 마침 라디오 사연이 나오고 있었어요. 어떤 여자가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에게 요즘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며 보낸 흔한 사연이었죠. 그때 J선배가 나한테 그랬거든요. 너도 서른 넘어서 막 라디오로 D야 그립다 어떻게 지내니 그러고 연락하고 사연 보내고 그럴걸? 나중에 분명히 내가 한 말 생각난다? 하하하, 하면서. 낄낄거리던 그땐 나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장담했는데, 가끔 라디오를 듣다가 비슷한 사연이 나오면 당신 생각이 납니다. 졸업하고 취직해서 가정을 꾸리고, 퇴근할 때에 한 손에 치킨이나 떡볶이를 사 갈 수 있는 평범한 가장이 되고 싶다던 당신의 꿈도. 그리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느냐는 말도. 나는 그때 그 말이 싫었던 것 같아요. 보통이 아닌 삶을 꿈꿨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죠, 그 평범함이 얼마나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당신이 분명 그 되기 어렵다는 평범한 어른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생각한 것을 어떻게든 의지로 해내는 사람이니까.  



한 번쯤은 전하고 싶었어요. 그때의 나를, 나조차도 믿어주지 못하던 나를, 자주 믿어주었던 당신이 정말 고마웠다고. 당신 덕분에 많은 시간을 버티어 냈노라고. 나는 도무지 나를 믿지 못하겠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스스로를 믿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이 그랬잖아요. 이 험한 세상에 나라도 나를 믿어줘야지 어쩌겠냐고. 맞아요. 그걸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겨우 조금 깨닫습니다. 역시 나는 늘 철없던 친구였던 가봐요.  



원하던 그대로, 당신의 자리에서 단단하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기를 바라요. 

가끔 생각나는 추억을 떠올리며, 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i2Qj3QDT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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