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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Nov 03. 2021

잘 지내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Letter Series] 사랑하는 진순씨께




진순 씨, 안녕

가시는 길 배웅 못 해드려서 죄송해요. 지난여름쯤에 한국에 들어가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역시 진순 씨가 위급하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안 갔을 거야. 봄에 들를 걸 그랬어요. 그 시간 동안 뭐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거든요.


우리 틂이랑 틂이 동생, 항시, 거-언강 하고 후-울륭한 사람 되어야 한다~


하고 짙은 전라도 사투리로 말씀하실 때, 동생이랑 네에~ 하고 대답했는데. 그치?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 못 되어서 죄송해요. 그게 그렇게 어렵네. 진순 씨가 우리한테 바란 건 그거 하나뿐이었는데도.




진순 씨, 가시는 길에 장례식장도 발인도 못 보고 먼 나라에 와 있는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도 있을까 해서 온 건데,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 혹시 있잖아, 그냥 겁이 많고, 문제 앞에서는 주로 도망을 치고, 말 안 되는 헛된 꿈이나 꾸는, 어느 집안에나 있는 그런 게으르고 무능한 백수 삼촌이 나인 거면 어떡해요? 가끔 혼자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도 우울에 깊이 빠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자신에게 만족해야 할까.


일 년 전에 말이에요, 동생이 결혼하던 때. 근 2년 만에 한국에 가 놓고는 내 방 구석에 앉아서 몇 시간을 펑펑 울었거든요. 엄마가 놀래서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사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래서 더 무서웠어. 내 인생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이대로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앞으로. 그걸 모르겠는 게 갑자기 너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계속 계속 눈물이 났어. 동생이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더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우리는, 아니 적어도 제게는 동생이 소울메이트이자 카운셀러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었거든요. 아니면 한동안 혼자서는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붙잡고 있던 긴장의 끈 같은 것이, 한국에 오니까 툭 하고 끊어졌던 걸지도 모르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마음이, 너무 익숙한 한국의 집, 내 방에 들어서니까 순식간에 공기처럼 섞여서 사라졌거든요. 그동안 네덜란드에서 지내온 시간들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진순 씨는 할머니였으니까 잘 몰랐는데, 진순 씨는 어떻게 아흔여덟 해를 사셨어? 남편도 일찍 가고, 다섯 자식을 먹여 살리고, 그 손주들까지 거둬 먹이면서. 오랜만에 들은 친척들 소식은, 온통 아프다는 이야기들 뿐이었어요. 친척 언니는 어디가 안 좋고, 누구 아저씨도 허리 때문에 고생이고, 늘 아침에 날계란을 마시던 처녀일 줄 알았던 막내 이모가 벌써 환갑이 다 되었대요. 그 이모의 딸이 진즉 시집을 가서 조카 태어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고 하고. 내가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당연한 건데, 그게 그렇게 새삼스럽네요.


실은, 진순 씨. 나는 가족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질하고 궁색한 삶이 싫었거든. 부모님처럼 돈돈 거리지 않으면서 내 꿈을 향해 갈 수 있을 줄 알았지. 이 땅만 벗어나면, 여행자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다르게 살고 싶었어요. 그럴 수 있을 줄 알고, 열심히 도망을 쳤지. 그게 어디든, 아비가 없는 곳,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박이 닿지 않는 곳, 여성 혐오에 시달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곳, 예술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인정해주는 곳을 찾아서, 멀리멀리. 그렇게 멀리 가도, 거기에 또 다른 궁색한 삶이 있을 줄 모르고. 애초에 일상이라는 건, 매일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가 봐요. 하지만 알았어도 나는 어디로든 떠났을 거예요.




진순 씨는 사시는 동안 행복했을까? 그때는 그냥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겠죠? 가난한 농가에서 줄줄이 딸린 형제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 입에 풀칠이나 하면 다른 것들까지는 크게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삶. 시집을 가고 또 자식들을 줄줄이 낳고, 남편이 먼저 가도 어떻게든 농사와 장사를 하면서 ‘억척스레' 자식을 먹이고 입히다 보니 어느새 늙고 아파진 몸이 서글픈 삶, 이라고 하면 너무 당신의 삶을 피상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걸까요. 지금 생각하니 30여 년 전의 진순 씨는 엄청 젊은 할머니였는데, 꼬맹이였던 나는 그걸 몰랐어요.


있잖아요, 막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이 슬프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냥 자꾸 눈물이 삐질삐질 나요. 내가 좀 미운 것 같아. 이것밖에 안 되는 내가, 여기 그냥 ‘존재하는 것' 말고는 하는 것 없는 내가 미워서. 나보다는 엄마가 훨씬 더 슬프겠죠. 우리 엄마는 엄마가 없어져서 어떻게 하지. 되게 속상하겠다. 나는 아직도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해봤거든요. 진순 씨가 이쁘게 낳아 기른 넷째가 자기 딸을 또 되게 열심히 키웠거든요. 알죠? 할머니 닮아서 부지런한 거. 그래서 나도 잘 살고 싶었는데, 그게 왜 잘 안되지.


예전에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낼 때, 그게 벌써 10년이 다 되었나. 그때도 이미 진순 씨는 치매 기운이 약간 있으시다고 엄마가 걱정하고 그랬거든요. 진순 씨가 해만 지면 그렇게 온 식구들 어디 갔느냐고 찾고 불안해하셨잖아. 해가 7시면 지는데, 이십 대 청춘인 나나 동생이 그 시간에 집에 갈 리도, 엄마나 아빠가 늘 24시간 집에 갇혀 있을 수도 없는데. 그렇게 해만 지면, 집에 빨리 오라고~ 오라고. 그때는 이유도 모르고 온 가족이 왜 그러시느냐고, 괜찮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이제야 생각하니까, 아마 진순 씨도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무도 모르는 이유라도. 왜, 사람들은 인생 어딘가에는 고장 나고 망가진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이젠 조금은 알 것도 같아. 분명히, 사연이 있었을 거야. 당신만 기억하시는.


가끔 옛날에도 심리상담 같은 게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화병을 품고 살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여성들이 하소연이나 수다 대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이해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역시 그것도 모두 가부장제 탓을 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 먼저 전쟁과 가난 탓을 해야 할까. 나는 늘, 밥 굶지 않고 따뜻한 집 있으면 다른 건 사치라고 생각하는 구세대의 가치관이 싫었어요. 밥과 집은 중요하지만, 다른 중요한 것도 너무 많다는 것을 사회는 쉽게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그 옛날에는 여자라고 학교를 보내주지 않아서 진순 씨는 말할 줄은 알지만 한글을 읽고 쓰는 일은 어려워했잖아요. 동생과 내가 어릴 때, 집에 와서 우리 키워주면서 가끔 우리가 쓰던 깍두기 노트에 진순 씨가 삐뚤빼뚤하게 쓰던 글자들이 기억나요. 상을 펴고 앉아서 연필로 흐릿하게 기임~ 지인~ 수운~ 하고 적고 나면 동생이랑 내가 와아아! 하면서 박수를 짝짝 쳤죠. 우리 할머니 잘한다! 하면서. 우리 그때 좀 행복했었나. 내가 그때는 진순 씨를 엄청 좋아했는데, 진순 씨가 치매가 오고, 요양원에 계시면서 점점 더 띄엄띄엄 보게 되면서 조금 어려운 마음이 되었어요. 그런 나와 다르게 동생은 늘 다정하고 살갑게 할머니~ 할머니~ 하고 잘하니까, 나중엔 정신이 오락가락해도 진순 씨가 엄마랑 동생은 기억하더라고요. 걔가 원래 좀 다정한 애잖아요.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건가 봐요.




태어날 때부터 내게는 시골 외갓집이 있었는데, 이제 정말 사라졌어요. 진순 씨가 있고, 외삼촌네 식구가 살던, 누렁이 강아지와 소 두어 마리가 있던 축사가 있고, 그 옆엔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웃풍이 세서 겨울이면 코 끝에 찬바람이 불던 그 집 말이에요. 우리 가족이 가끔 놀러 가면 애들 좋아할 만한 찬이 없다고 이것저것 꺼내 주시던 부엌이 있던 시골집. 생각해보면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일 년에 한 번 밖에 못 봤네. 명절도 아니고, 진순 씨 생신이랑 할아버지 기일이 있는 2월, 일 년 중에 제일 추운 달에 한 번. 그것도 매년 못 갈 때도 있었으니까. 늘 흰 눈이 있고, 입김이 서리고, 추웠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어릴 땐 눈밭에서 열심히 뛰어 놀기도 했는데, 사촌 언니 오빠들이랑. 언니들이 진짜 나무를 깎아서 윷을 만들어주면 같이 윷놀이도 하고, 고구마도 구워 먹고, 엄마가 예전에 다녔다는 학교 구경도 하면서.


이제 엄만 진순 씨가 늘 캐어 말려 두었던 오물조물한 나물들이랑 키워서 주시던 녹두 콩, 좋아하시던 홍시랑 요플레, 그런 거 보면 진순 씨 생각이 나겠죠? 그때 가만 엄마 꿈에 놀러 와 줘요. 다섯 남매 꿈에 쫓아다니시느라 바쁘겠지만, 그래도 울 엄마가 할머니한테 제일 잘했잖아. 제일 친하고, 편하고, 그런 딸이었잖아. 그리고 이젠 자유롭게 훠이 훠이 다니시면 좋겠다. 병원에 오랫동안 누워계시느라 늘 갑갑해하셨잖아. 그러고 보면 고단한 진순 씨의 삶에 교회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싶어요. 나야 그 세계를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 믿음이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 주었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죠.




진순 씨.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이제라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진짜 대단한 사람 말고, 그냥 사람 구실 한다 싶은 바르고 옳게 사는 사람 말이야. 지금부터 노력하면 나-아중에라도, 그럴 수 있을까?


올해 당신 기일에는 예전에 찍어둔 귀여운 토끼 인형 모자를 쓴 진순 씨 사진을 엄마한테 보내고 말을 걸었어요. 첫 해에는 사실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물어봤거든요. 엄마가 슬프다고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나는 어떻게 엄마를 위로해줄 수 있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진순 씨가 엄마 생일엔 팥밥이랑 잡채랑 이런 걸 해주면서 생일을 챙겨주었다고 하면서 어렸을 때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내가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들, 진순 씨가 할머니가 아니던 시절. 엄마가 누군가의 딸이기만 했던 시절.


나의 엄마도 언젠가는 할머니가 되겠죠? 당연한 일인데, 벌써 겁이 나요. 아직도 마음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어떤 날엔, 엄마가 해주던 다정한 음식과 마음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거든요. 지구 반대편에 엄마가 건강히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 발걸음을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는 기운이 생기고요. 어쩌면 무서운 것은 엄마가 아프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감당해야 하는 나 이거나 엄마를 잃은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어요. 이건 이기적인 마음일까 솔직한 마음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영원히 엄마같은 마음으로 내 엄마를 대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거예요.




할머니,

이미 너무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좋은 곳에서 편히 쉬면서 잘 지내고 계시면 좋겠어요.

거기서는 고단하지 않은 마음이시기를 빌며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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