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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Oct 28. 2021

세상 쿨하고 다정한 사람, 나의 홍길동 씨




- 오늘도 홍길동 씨 왔다 갔어?     

- 어, 오늘도 먹을 거를 한 보따리 갖다 놓고 그냥 가부렀어! 


홍길동 씨는 별명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지었다. 양평에 사는 홍길동 씨는 경기도의 다른 쪽 끝에 사는 엄마의 집까지 수시로 찾아와 직접 키우거나 얻은 먹거리들을 잔뜩 풀어놓고 간다. 엄마는 늘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지만, 홍길동 씨는 그저 먹을거리만 문 앞에 두고 엄마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떠나는 날이 더 많다. 어제는 서울이었다가 또 금세 강원도다. 집에 오래 붙어 있으면 답답하다나. 그러니 홍길동 씨일 수밖에. 


홍길동 씨와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던 적이 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몇 년 정도는 함께 살았던 것 같다. 홍길동 씨는 아침마다 우유에 날계란을 깨 먹고 나갔다. 유리컵에 찰랑이는 투명한 흰자와 그 속에 노랗고 동그란 노른자가 그렇게 이상하고 신기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날계란을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어느 날엔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동생과 내 눈을 보더니 너희도 먹어볼래? 고소한 맛이야, 하고 권했던 것 같다. 입에 닿자마자 우웩- 하고 뱉었던가. 대여섯 살짜리 어린이들에게 날계란은 비리고 오묘한 맛이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그 어느 누구보다 쿨한 영혼인 홍길동 씨는, 단언컨대 그 시절의 잘 나가는 청춘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입었던 옷만 봐도, 아니 요즘에 입는 옷을 보아도 예사롭지가 않다. 찢어진 청바지나 독특한 모양의 가죽 벨트를 입던 청춘은 요즘엔 자연에서 온 것 같은 색의 개량 한복을 입는다. 뼛속까지 고지식한 형제자매들과는 날 때부터 다른 피를 가진 사람처럼, 모든 것이 달랐다. 

홍길동 씨는 엄마의 막내 동생이다. 






조카와 자식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아마도 다를 것이다. 그녀는 필요한 것들을 공수해주는 부모님과는 다르게, 동생과 내게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예쁘고 트렌디한 것들을 주로 사주었다. 당시 엄마는 아침마다 내 긴 머리를 묶어주셨는데, 호박 모양의 플라스틱 통에 형형색색의 화려한 머리끈들을 가득 채우는 일은 대부분 그녀의 몫이었다. 우리와 함께 살지 않을 때에도, 그녀는 우리를 볼 때마다 손에 작은 선물을 들고 왔다. 언젠가 학용품과 함께 사다준 베이지색의 기린 일러스트가 그려진 철 필통은, 십 년이 넘게 책상 서랍 맨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끼는 지우개와 펜, 새 연필, 책갈피 같은 것들을 넣어서 관상용으로 오래도록 가끔 꺼내어 보기만 했다.


우리는 죽이 꽤 잘 맞는 사이였고, 그녀는 한결같이 내 편이었다. 예외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감기 기운이 있어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조르면,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가자! 하고 손을 잡아 이끄는 마이웨이 아가씨였다. 물론 엄마는 그 옆에서 혀를 쯧쯧 차며 안돼, 너도 니 새끼 낳아봐라, 그렇게 되나 보자. 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엄마가 되고 나서도 본래의 성격대로 시원시원하게 본인의 아이들을 키워냈다.(고 한다.)



엄마와 이모를 구분하는 요소가 단지 나이뿐 만은 아닐 것이다. 터울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닌데, 내게는 늘 엄마는 성인 여성 같은 느낌이, 이모는 젊은 아가씨 같은 느낌이 있었다. 성격 탓일까. 그녀가 뭔가를 오래도록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아닌 것에는 목을 메지 않고, 지나간 것에 미련을 갖지도 않는다.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지금 좋은 것을 하면 그뿐이다. 사람 천년만년 사는 거 아니라고, 늘 말했다. 그야말로 그 시절의 욜로(YOLO)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그녀가 세상을 마냥 편하게 살아와서 그런 것도 아니다. 홀어머니 아래 어렵게 자랐고, 자신도 홀로 고생스럽게 두 아이를 키웠으며, 또한 내가 목격하거나 혹은 알아차리지 못한 많은 인생의 굴곡을 넘어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늘 어쩐지 인생에 초연한 사람처럼 굴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에어컨이 필요하면 엄마와 내가 온갖 인터넷 발품을 팔아 비교 끝에 가성비가 가장 좋은 품번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고른다면, 이모는 그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최신형의 기기를 바로 주문한다. 굳이 가진 것으로 따지자면 이모보다는 엄마가 여유로운 편인데도 그렇다. 생각의 방식의 차이랄까. 

그래서 그녀와 대화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나는 엄마와 눈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아쌀하게, 홍길동 씨처럼 살아야 돼. 우린 아직 멀었어!'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도, 그녀는 그저 내게 거기(유럽) 좋니? 그럼 됐어, 잘 살아. 할 뿐이다. 하긴,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이모, 건강관리 잘해야 해, 하는 정도니까. 우리는 여전히 아주 가깝고 살가운 마음을 나누는 사이이지만, 더 이상 삶의 디테일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 해외 살이가 한 해씩 늘어갈수록, 내가 묘사할 수 있는 디테일은 줄어든다. 이제는 겨우, 건강해. 잘 지내. 정도가 내가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


마지막에 그녀를 본 것은 몇 년 전, 또 엄마의 집에 먹을거리를 싸들고 와서 전해주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들이닥치는 일은 대체로 예고가 없으므로, 겨우 몇 시간 전에야 알게 된다.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났지만 휘적휘적 선문답 같은 문장들을 주고받았다. 반갑고 아쉽지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떠나면서, 이번에도 그녀는 내 손에 휴지로 싼 작은 종이를 쥐여주었다. 아니, 이모, 내가 지금 몇 살인데...!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을 꾸욱 삼키고, 냉큼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다. 


집에 돌아와 펼쳐본 휴지 속에는 막 은행에서 새로 뽑은 빳빳한 오만 원 권 한 장이 곱게 접혀있었다. 핸드폰의 노란 카톡 창에는 많이 못 줘서 미안해, 하는 메시지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서른을 넘은 조카에게 주는 용돈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늘 내게 이십 대의 청춘인 것처럼, 그녀에게도 나는 꼬꼬마 시절의 조카로 남아 있을까.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으면서 씩씩하게 답장을 쓴다. 이모, 다음에는 내가 돈 벌어서 꼭 용돈 많이 줄게!






가족 전체가 서로 살갑게 안부를 나누는 것에 인색한 무뚝뚝한 사람들이다. 친척이고 부모 형제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며 산다. 길게 통화라도 할라 치면 전화비 나오니까 얼른 끊어, 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 가끔 엄마를 통해 안부를 전하거나 통화 옆에서 몇 마디 거드는 것이 크고 난 이후 이모와 나의 소통의 전부였다. 그런데 작년에 코로나로 세계가 들끓는 통에 그녀에게 처음으로 연락이 왔다. 잘 지내느냐고, 유럽이 난리라던데 괜찮냐고. 해외여행 한 번 가 본 적 없는 이모에게 유럽은 어떤 세상일까. 상상 속의 먼 곳에 있는 조카가 어떤 삶을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으려나.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최근에 찍은 내 사진을 하나 보내고, 이모에게도 사진 한 장을 보내달라 하니, 꼭 엄마처럼 싫어! 한다. 나이가 들면 사진 찍기가 싫다나. 엄마도 늘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하지만 내게도 이젠 내공이 있다. 당황하지 않고 이모, 지금이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 제일 젊은 순간이래. 헤헤. 하며 넉살을 부려 본다. 이모가 못 이기는 척 키우는 강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왔다. 어두운 베란다에서 이모의 품에 포옥 안긴 갈색 푸들의 털 사이로 보이는 동그랗고 까만 눈이 이모의 커다란 눈과 몹시도 닮았다. 내가 사랑하는 눈. 커다랗고 깊고 반짝이는. 


- 우와, 이모는 여전히 예쁘네! 우리 홍길동 씨는 왜 아직도 아가씨 같지! 영원히 청춘인가 봐.  


호들갑스럽게 답을 보내니, 그제야 ㅎㅎㅎ 하고 웃는다. 




홍길동 씨는 확실히 언젠가 운전면허를 따고 훨씬 더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차로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녀의 집 냉장고는 늘 직접 키운 각종 작물들과 담가 둔 효소들로 가득 차 있고, 그녀는 그것들을 주변에 나르느라 바쁘다. 예전의 엄마와 나는 다 먹지도 못할 것들을 뭘 그렇게 많이 만드느냐고 먹을 만큼만 하라고 잔소리를 했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게 본인의 기쁨이라는데 뭐. 이제는 그저 이모도 자신의 어느 빈 마음 한 구석을 그런 것들로 채우고 있는 게 아닐까 건너 짚어 볼 뿐이다.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이모가 신세 진 사람들에게 갚는 방식인지도 모르고. 이왕 말리지도 못할 거,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게 음식이라도 실컷 나누며 즐겁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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