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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Nov 14. 2023

조금은 더 당신을 좋아해 볼까 해요

[Letter Series] 친애하는 나의 H에게, 2





오랜만이었지요. 내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팔꿈치를 툭 하고 내어준 것도, 아니면 눈을 맞추어 준 것도, 그 다음으로 오랜만이에요! 말을 건넨 것도 당신이 먼저였고요. 왜냐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모르고 있었거든요. 이게 얼마만이던가요. 어.. 그러니까, 당신이 거기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고백은 먼저 해야겠습니다. 친구에게 누가 오는지 슬쩍 물어보았거든요. 그래서 갈까 말까 고민을 좀 했어요. 혹시 마주칠지도 모를 당신을 마주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평소처럼 지레 겁을 먹고 피하는 것이 나을지를 결정해야 했으니까요. 당신이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를 잘 모르겠어서.  


하지만 그렇게 오랜 고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벌써 코로나가 지나고도 한참인데, 그동안 가족을 제외한 지인을 거의 만나지 못했거든요. 이번에는 누구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한국 말과 한국 사람과 무엇보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그리운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거든요. 이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촉발할지는 몰라도,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으면 부딪혀보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 혼란한 상태로 한 결정일지도 모르지만.






친구의 덤덤한 인사와 너무 긴 시간의 텀이 주는 어색함 사이에 서서 빨리 그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신을 만났지요. 나를 향해 너무 다정하게 웃어주는 바람에 눈물이 찔끔 날 뻔했지 뭐예요. 어쩌면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어떤 얼굴을 할지 정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그때의 표정을 보고 싶더라고요. 나는 어떤 얼굴로 당신을 마주했던가 하고요. 반가움이었을까요, 당혹스러움이 먼저였던가, 아니면 죄인의 얼굴, 혹은 표정을 숨기고 싶은 얼굴? 그러느라 당신이 나를 보았을 때의 표정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러는 동안 먼저 호들갑스럽게 말을 걸어주는 것보다 더 좋은 인사법은 없었을 거예요, 그 순간에. 나는 이렇게 또 작은 빚을 져요, 이번에도.


하지만 단언컨대, 내게 가장 큰 마음은 아마도 반가움이 아니었을까요. 인사받아줘서 고마워요, 하는 말이 내 어깨에 닿을 때, 멋쩍게 웃게 되더라고요. 어떤 일이 있었던지, 왜 이렇게 되었던지 같은 걸 떠올릴 시간이 없었어요. 그저 몇 년 만에 만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제 만난 것 같을 수 있다니. 너무 우습지 않던가요.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던 사람들처럼.


그날, 최근의 그 어느 날보다 많이 웃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자꾸 웃는 내가 이상해 보였죠. 밤샘하던 시절처럼 잠을 너무 못 자서 하이(high) 한 게 아니냐고 할 정도로. 그게, 기억을 더듬었더니 금세 기억이 나더라고요. 우리가 쪼르륵 도산공원에 앉아 밤을 지나던 시간들, 눈 오는 날 도서관 옆 애벌레처럼 생긴 이상한 다리 위를 뛰어다니며 커다랗게 깔깔댔던 날들, 언덕 꼭대기의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과 수많은 이야기들. 그때 내가 되게 행복했다고, 당신들을 진짜 좋아했다고, 그런데 지금도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날 밤엔 그동안 잊혀진 인연들이 모조리 다시 엮이는 것 마냥 기쁘고 행복했는데요, 하루가 지난 지금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다시 만나도 그저 과거의 추억만 나누는 관계가 될까요? 이 관계는 새로운 유효기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현재를 나눌 수 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은데, 당신과 내가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어제의 짧은 만남이 설사 우리를 다시 현재로 이어 줄 수는 없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스스로를 칭찬했죠. 당신을 마주하기로 결심한 일이 그렇게 잘 한 일일 수 없다고. 언제나처럼 내가 상상하는 가장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나는, 그냥 조금은 더 당신을 좋아해 볼까 해요. 내 안에 아직은 그런 마음이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러니까,

이 편지는 나의 친애하는 모든 H들에게 전하는 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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