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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Jun 14. 2020

팽이가 돈다

@ Odaiba


팽이가 돈다. 집 앞 마당에서 아이들이 팽이를 돌리며 놀고 있다. 나는 툇마루에 손님으로 앉아 있는데, 주책맞은 호기심이 온 몸의 신경을, 주인과의 대화도 잊어버리게 하고 자꾸 저 쪽의 팽이로 잡아끈다.


그 누구의 집을 가봐도 나보다는 여유 있어보이고 그리 바쁘지도 않으니, 이 정신없는 도시에서 늘 쫓겨 다니듯 살고 있는 내 눈에는 모든 게 별세계 같기만 한데, 아까부터 앞 마당에서는 마치 ‘달나라의 장난’처럼 팽이가 돌고 있다. 아이가 팽이에 끈을 묶어 바닥으로 내어던지면 온 몸이 회색빛으로 변하여 그 자리에 서서 도는 것이다.   


팽이가 돈다. 아이들이 돌리고 있는, 신기하게 돌고 있는 저 팽이에 나도 모르게 코 끝이 시큰거린다. 그래. 그저 혼자서 묵묵히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 공통된 그 무엇으로 위하여 울면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아무 것도 아닌 저것이 나를 울린다.


황망히 인사를 마치고 그 집을 빠져나온 후에도 내 마음 한 귀퉁이 어딘가에서 팽이가 돌고 있다. 까맣게 돌아가는 팽이가 내게 묻는다. ‘너는 스스로 돌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돌고 있는가? 대체 무엇을 위해 돌고 있는가?’ *




도쿄 심바시역에서 ‘유리카모메’라는 무인 전철을 타면 레인보우 브릿지를 지나서 오다이바가 나온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도쿄만에 위치한 매립지를 주거, 관광 및 쇼핑을 중심으로 재개발한 인공 도시이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된 뒤, 도쿄는 이시하라 신타로라는 극우파 도지사를 중심으로 ‘도쿄 대개조’를 추진해나간다. 그 축의 하나가 도쿄 중심에 "메가 프로젝트가 집중된 핫 스팟을 조성해 다국적 기업의 종합 오피스나 금융, 정보, 미디어, 각종 부티크와 레스토랑, 카페 등 고급 소비시설, 타워맨션, 오락시설 등으로 구성되는 거대 복합체로 개조”**하는 계획이다. 바다 건너편으로 오다이바를 훤히 보이는 여기 고층 빌딩이 서 있는 시오도메의 시오사이트, 롯봇기 힐스와 미드 타운, 마루노우치 재개발 등이 그 구상이 현실화된 모습이다.


도쿄로 처음 여행을 왔을 때 보았던 오다이바의 인상이 떠오른다. 물론 처음이라 모든 것이 신기했던 그때는 무인 열차도, 레인보우 브릿지도, 오다이바의 빌딩들과 저 멀리 보이는 도쿄의 스카이라인도 마치 미래 도시에 온 듯 멋지게 보였다. 또 일본으로 발령을 받은 뒤 사무소 개설을 준비하며 머물렀던 시오도메의 어딘가 비현실적인 고층 건물의 매끈한 표면들과 세련된 표정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살면서 다시 찾은 오다이바는 왠지 지쳐보이는 느낌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쇼핑을 하는 관광지이긴 하지만, 마치 촬영을 끝낸 영화 세트장처럼 퇴색한 듯 느낌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거대한 자본의 힘으로 근근히 떠받치고 있는 인공 도시의 본모습일까. 도쿄라는 메가 시티가 꾸는 꿈들-롯본기힐즈, 미드타운, 마루노우치, 시오도메 등-도 멋진 잠에서 깨고 나면 이런 씁쓸한 뒷맛을 남길까.


이건 대체 누구의 환타지일까.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무국적 대자본의 꿈을 따라, 어딘가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쿨하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다른 이들이 그 곳으로 달려가니까, 뒤쳐지면 괜히 나만 손해볼 것 같으니, 때론 세상을 구하겠다는 훌륭한 꿈도 품고서…


갑작스레 연락이 닿은 지인과 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도쿄 시내와 오다이바를 잇는 레인보우 브릿지를 바라보다, 문득 내가 가닿으려는 곳이 저 오다이바 같은 인공 섬은 아닌지 마음 속으로 되물어 본다. 누군가를 따라하는 거짓된 몸짓이나 허영이 담긴 허세에 불과한 건 아닌지, 자신있게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살짝 오른 취기 탓만은 아닌 듯 하여 아주 잠깐 옛 시인처럼 서러워진다. 나는 대체 누구의 뒷꽁무니를 좇고 있는 것일까.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구해야 하는데, 오늘도 나는 스스로 돌지 못하고 누군가의 헛된 쳇바퀴만 돌리고 있구나.'




* 김수영의 시 '달나라의 장난'을 기초로 재구성


** 강상중, <청춘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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