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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Jun 17. 2020

어른과 아이의 경계


아담과 하와는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 형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양치기였다. 최초의 농부인 카인은 땅의 아름다운 수확물을, 최초의 목동인 아벨은 가장 좋은 가축을 골라 하느님께 바쳤다.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은 기쁘게 받았지만 아벨의 제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에 질투를 느낀 카인은 동생 아벨을 몰래 들로 꾀어내어 돌로 쳐 죽였다.


이에 하느님은 진노하여 ‘땅이 너의 손에서 아우의 피를 받았으니, 너는 땅에서 저주를 받아 밭을 갈아도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않을 것이며, 끝없이 떠돌아 다니게 되리라’ 말하며 카인에게 영원한 유랑 생활을 명했다. 카인은 자신의 죄를 후회하며 이 곳을 떠나 유랑하다 아담과 하와의 다른 자식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렵다고 하나님께 고했다. 이에 하나님은 그에게 ‘카인의 표식’을 내리며 카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 말하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어릴 때 다니던 작은 성당에서였다. 어린 나이에는 참 이상하게 여겨지는 이야기였다. “하느님은 왜 아벨의 제물은 받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을까?” 좀 더 자란 뒤, 이 이야기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다시 만났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 이야기는 신으로부터 독립한 카인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훗날 그를 질시하여 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의 말과 함께 싱클레어는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세계 너머로 한걸음 옮기게 된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구약 성경에만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 형태의 동일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공통점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한 명은 선택을 받고, 또 한 명은 버림을 받는다는 점이다. 가령 어떤 혹부리 영감은 혹을 떼고, 다른 혹부리 영감은 혹 떼러 갔다가 혹을 붙인다. 살다보면 우리는 세상이 그다지 공평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선징악은 전래동화 속의 엔딩일 뿐, 세상은 기본적으로 부조리하고 현실은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에 회심의 일격을 날리곤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젊음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 바로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지점일게다. 이삽십대에 품었던 꿈과 이상들이 현실과 일상에 부딪히면서 하나, 둘 조각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인생임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된다. 약간의 위안이 있다면 젊을 땐 서러워지면 세상에 등 돌리고 고개를 푹 파묻었다면, 이제는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시시포스가 산꼭대기로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올리는 형벌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이리라. 대체 산 정상으로 밀어올리는 순간 다시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밀어올리는 일 따위가 이 X같은 상황을 해결하는데 어떤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한다. 아니, 하려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나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 필립 로스, <에브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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