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와 저 세계
요즘 푹 빠져 보고 있는 드라마는 '나의 해방일지'와 '우리들의 블루스'이다.
그중 지난 토요일 방영된 '나의 해방일지' 13화를 보다가 든 생각을 써보고 싶었다.
극 중 미정이 구씨에게 날린 "날 추앙해요"라는 대사는 어쩌면 작가님이 시청자에게 한 말이 아니었을까.
날이 갈수록 '나의 해방일지' 작가님을 추앙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해방일지 12화에서는 현아가 이런 대사를 한다.
"내가 작가나 해 볼까 하고 잠깐 작법책 본 적 있는데 좋은 드라마란 주인공이 뭔가를 이루려고 무지 애쓰는데 안 되는 거래. 그거 보고 접었어. 인생이랑 똑같은 걸 뭐하러 써? 재미없게"
그런가? 했다가 바로 다음 13화에서 나는 아! 하고 머리를 탁치고 말았다.
이 드라마 정말 삶과 똑같구나.
"날 추앙해요"라는 충격적인 대사 이후로 줄곧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마음에 마구마구 때려 넣어 주는 드라마였다. 기대 없이 보다가 입을 벌리고 '이 드라마 뭐지?' 하게 되는.. 드라마를 봤을 뿐인데 갑자기 내 일상이 살짝 드라마처럼 느껴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하는. 매 화 그런 것을 선물 받아서 일종의 관성처럼 선물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 내게 13화는 좀 충격적이었다.
드라마를 보고서 다른 시청자들의 의견 같은 걸 찾아보는 편은 아닌데, 13화를 보고 나서는 좀 궁금했다. 네이버에 '나의 해방일지' 검색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의견을 읽었다. 충격적이라는 의견과, '원래 해방일지 보면 힐링되는데 이번엔 우울해졌어요' 같은 의견들이 보였다. 그걸 보고 내가 기대한 전개와 사람들이 기대한 바가 크게 다르지 않았구나 싶었다.
왜 우울해졌을까, 어떤 기대가 좌절됐을까. 12화가 끝난 시점에서 앞으로 전개될 거라 기대한 바는 구씨와 미정의 필연 혹은 우연에 의한 재회, 이 기세를 몰아 드디어 얻게 될 염씨 삼남매의 해방. 그로 인한 나의 대리만족. 그런데 이게 힐링이기 위해서는 기존 세계인 산포 그리고 가족, 그 구성원들의 의식주의 안녕, 그 근본적이고 안정적인 울타리의 유지가 전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13화에서 작가님은 너무나 근본적이라 고려도 하고 있지 않던 세계를 해체시켰다. 창희의 퇴사, 혜숙의 죽음, 삼남매와 사람 냄새가 사라진 집은 하나같이 느닷없게 느껴졌다. 해방을 하느냐 마느냐에 마음 태우던 난 이 갑작스러운 근본의 해체를 직면해야 했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목이 잘리면 달려가서 치마폭에 잘린 머리를 '받겠다'던 기정이처럼 나는 한순간에 훅하고 염씨네에 드리워진 어둠, 그 초췌해진 염씨네 가족을 '받아'야 했으니 그건 힐링보다는 우울이 맞겠지.
솔직히는 충격적이긴 했으나 우울하진 않았다. '어쩜 이렇게 솔직하게 삶과 똑같을까' 감탄했을 뿐.
이것 저것 다 가지려는 욕심을 냈었다. 나만 더 부지런하면, 내가 더 열심히 하면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행동이 뒷받침되는 욕심은 건강하며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덕목이라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갓생'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나도 그게 새로운 시대의 미덕인 줄 알았다. 그게 바로 지옥문이 열리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스스로를 한참이나 고통 속에 몰아넣고 나서였다.
이 세계에 살면서 저 세계를 꿈꿨었다. 이 세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저 세계를 만들어 가겠다는 욕심을 감히 부렸었다. 내게 그런 에너지가 없었음에도 이 세계를 놓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 세계와 저 세계 두 개의 땅에 발 걸치고 있다가 가랑이가 찢어지고 나서야 이 세계가 무너져야만 저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법칙,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그런 법칙만이 허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삶의 어떤 부분은 '이 세계'의 해체가 '저 세계' 구축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그 '영역'이라는 것은 모두의 삶에서 다르겠지만.
그래서 염씨네 가족에게 닥친 느닷없는 혼란을 달려가 치마폭에 받아내면서도 '도대체 왜? 이래야만 하나?' 라고 묻지는 않았다. 염씨네의 '해방'이라는 세계가 구축되기 위한 그 어떤 법칙이 작용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느닷없이 우울해지고 하나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면 또 다른 세계가 생겨나서 우울과 맞짱뜰 수 있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장면들이 계속 펼쳐지는 드라마가 실제로 당신과 나의 삶이라 믿는다.
이 사랑스러운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