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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Ale Jan 21. 2023

정이

발전한 한국 SF

기대와 우려가 컸던 영화이다. 기대가 컸던 것은 부산행과 지옥을 통해 연출 능력을 보여준 감독이 시도한 본격 SF라는 점에서 기대가 컸고, 트레일러에서 보여준 영상이 기대를 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려가 컸던 것은, 소재 자체가 이미 진부한 소재라는 점과, 트레일러에서 보여준 장면들이 기존 영화에서 이미 본 듯한, 그러니까 딱히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영상은 아닌 듯 하다는 점에서 우려가 컸다. 승리호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

기대와 우려 끝에 공개된 영화는, 반반이라고 해야겠다. 우선 우려했던 부분인 진부한 소재를 풀어내는 스토리라인은 큰 문제가 없었다. 뛰어나다고는 하지 못하겠으나, 진부한 소재를 진부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한국적인 정서를 녹이고 계급에 관한 사회성 있는 메시지도 살짝 담으면서 진부한 소재의 진부함은 벗어났다고 봤다. 적어도 개인적인 평으로는, 꽤 잘 풀어냈다고 봤다.

영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영상미가 지배하는 내용이 아니기에, 그리고 또한 거대한 전투씬이 주가 되는 내용이 아니기에 영상미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미래 사회를 적절하게 구현한 영상이었고, 만족스러웠다. 한국 영화의 그래픽 수준은 이제 확실하게 수준급이 되었다. 다만, 영상들이 어디에선가 본듯한 그런 장면들이 곳곳에 보이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트레일러가 공개된 후 "공각기동대" "알리타" 등을 언급하는 비판이 많았는데, 다른 영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런 비주얼이 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전혀 아니기에 문제될 것은 없다. 물론 모든 장면이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비주얼로 채워졌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겠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특히 김현주의 연기는 굉장히 뛰어났다. 연상호감독이 "지옥"에서 김현주를 잘 활용했는데, 정이에서도 김현주의 역할과 연기는 더할나위없이 적절한 선택이었다. (고)강수연의 절제된 연기도 좋았으며, 다소 과장되게 느껴지지만 그렇게 표현을 해야 했던 류경수의 연기도 적절했다. 

아쉬운 점은, 계급 사회가 미래에 AI와 뇌복제술로 인해 어떻게 빈부격차가 강화되고 극단화 되었는지가, 그저 간략한 대사에 의해 표현된 것과, 따라서 영화의 주제가 그런 사회성 있는 메시지인지, 모녀간의 휴먼드라마인지, 혹은 AI의 정체성과 인격에 대한 메시지인지, 모호해졌다는 점이다.  충분히 몰입해서 즐길만한 영화인데, 감독이 전작인 "지옥"에서 보여줬던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지옥에서는 극을 끌고가는 장치인 저승사자의 등장 비중이 크지 않았기에 사회적 메시지가 부각되었는데, 정이에서는 극을 끌고가는 장치인 정이가 메인 캐릭터로 극의 대부분을 끌고가는데, 상당부분이 액션씬이다보니 사회적 메시지는 거의 완전히 액션에 묻혀버렸다.

아쉬운점이 있지만, 또한 한국 SF 장르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만족할 만한 영화이기도 하다. 기존 좀비물 장르가 한국에서 새롭게 태어났듯이, SF도 한국적 SF로 발현되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하면 약간은 과장일지 모르나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하겠다. 엉성했던 승리호와 비교하면 확실하게 발전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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