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관점을 바꾼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연합고사를 준비하던 어느 날 좁은 인도를 걸어가며 유난히 마주 오는 많은 사람들을 피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왜 눈으로 보고 반응하며, 눈의 위치는 얼굴 어딘가에 있는가?
마주 오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가볍게 몸의 방향을 틀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만약, 지금 내 시선이 얼굴 어딘가에 위치해서 시각을 처리하는 신체 기관이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부터 정보를 습득하게 된다면?
만약, 정말 만약 나의 발에 눈이 있다면 지금 내게 들어오는 시각 정보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만약, 정말 만약 나의 왼쪽 어깨 어딘가에 눈이 있다면 지금 내게 들어오는 시각 정보는 어떻게 보일까?
만약, 정말 만약 나의 오른손 엄지손가락 끝에 눈이 있다면 지금 내게 들어오는 시각 정보는 어떻게 보일까?
그때부터 조금씩 시점의 변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보통 흔하게 보는 장면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만약 나의 손가락 끝에 눈이 있다면 지금 키보드의 자판을 두들기는 상황에 내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이 확장되면서 눈의 위치는 내 몸의 어디가 아니라 나의 외부 어딘가로 이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가령, 지금 모니터를 보면서 브런치에 글을 쓰는 내 모습에서 조금 더 시선을 뒤로 움직여서 나의 뒤통수와 그 앞으로 보이는 모니터를 인지하고, 조금 더 시선을 뒤로 움직여서 벽을 넘어서 누군가의 방을 살펴보고, 조금 더 뒤로 움직여서 건물 밖에서 내가 있는 건물을 살펴보는 모습과 같이.
지금은 이런 시점의 변화가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래픽 기술을 활용한 시점의 변화를 표현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쉬운 방법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시점의 변화를 종종 상상하곤 한다.
조금 학술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메타인지의 일종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메타인지에서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타인의 시점이라는 객관적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다.
시점의 변화는 종종 문제와의 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가령 직장생활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상대가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언행을 하는 동안 그것에 관여하지 않고 시선을 멀리 두는 것이다. 물론, 내가 약간 낭창하게 보이는 부정적 요소는 있으나 어차피 상대 또한 감정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나 또한 감정으로 대하면서 문제를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더 크게 작용하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문제 상황에서 단순하게 시각적 위치만 바꾸게 되는 것으로도 내가 얼마나 큰 공간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그 작은 부분을 다툼으로 채우려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얼마나 큰 유익을 얻으려고 그런 사소한 갈등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려 하는지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는 여유를 만들게 된다.
물론, 이런 성인과 같은 대처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사람이기에 너무도 자주 갈등상황에서 시선을 멀리하기보다는 상대에게 더욱 가까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시점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갈등 상황을 빨리 종료하는 방법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시내를 다니다 보면 호객행위를 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았다.
행인들이 보기 쉽게 매대에 다양한 종류의 신발을 진열하고는 잠시라도 신발을 보고 있으면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친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안에 들어와서 물건을 보라고 하는 방식으로 손님을 유도했었다.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깔끔한 디자인의 컨버스화를 봤었고, 험상궂은 아저씨의 능수능란한 호객에 멋모르고 그곳에 들어갔었다. 아저씨는 괜찮다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의 신발을 내 앞에 꺼내놓고 있었고, 나는 그게 부담돼서 정말 괜찮다고 매장을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험상궂은 아저씨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어른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물건 꺼내라고 하고선 그냥 간다는 게 말이 되냐면서, 윽박을 지르는데, 아저씨의 호통에 순간 매장에 있는 사람들과 골목을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집중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뉘앙스가 이상했다. 분명, 꺼내라고 하지 않았고, 본인이 들어오라 했는데 이야기의 방향은 우리가 본인을 우롱한 것 같은 느낌이었고,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우리는 그에 대한 반발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상황을 한 걸음 뒤에서 살펴보자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내 감정을 이입해서 갈등 상황에서 승리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요구하는 방향은 자신과의 언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우리가 소위 버릇없는 아이들이 되어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게 하는 전략이 아닐까 라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아저씨에게 죄송함을 이야기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받아들이게 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저씨의 당황하는 눈빛을 봤다.
그리고 아저씨는 얼버무리듯 조금은 주눅 들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그리고 우리는 그 매장에서 편안하게 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그곳을 자주 다니는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역시나 아저씨는 그런 방법으로 강매를 하는 장사꾼이었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그런 장사꾼들은 이제 없어졌지만 말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습관, 본능, 관성에 의존해서 우리의 시선에서 습득하는 정보를 수용하게 된다.
상대가 내게 분노를 표출하면 나 또한 분노를 표출한다. 그래야 싸움에서 이긴다고 생각하고 내가 강자이고 승자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상대가 내게 표현하는 분노의 표출이 내 감정이 상대에게 투영되어 그러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한다.
때로는 상대의 분노에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시점을 바꾸는 연습이 중요한 이유는, 관성의 법칙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대가 유도한 방법으로 내 감정이 흘러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시점을 조금 뒤로 해서 상대방의 전략을 살펴본다면 당연스럽게 내가 가는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함으로 상대가 당황하는 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점을 바꾸는 연습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신의 뒤통수에 눈이 있다면 어떤 시각 정보가 들어오고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신의 스마트폰, 또는 모니터에서 당신을 보고 있다면 어떤 모습이 그려지고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당신을 보고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을까? (음흉하거나 무서운 감정을 주입하지는 말자. 그냥 단순하게 보이는 시각적 정보만을 생각하자.)
일단 물리적 시점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자. 그러다 보면 조금씩 다른 것도 바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