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정답이 없을 수도 있다.
글쓰기.
종이와, 펜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스마트폰만 있어도 충분히 가능하고, 스마트폰에 블루투스 키보드만 있어도 더 편하게 할 수 있으며, 컴퓨터가 있다면 역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글쓰기.
개인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자주 언급한다.
친구를 만나거나, 동료 교사들을 만나거나, 학생들을 만나거나, 심지어 블로그나 지금 여기 브런치에도 글쓰기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최소한의 도구로 작성 가능한 것이 글쓰기이고,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가는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라는 생각에서다.
지식이 있으면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풀어가며 글쓰기 해도 되고, 통찰이 있다면 그것을 이야기하면 되고, 즐거움, 기쁨, 관찰한 것과 경험한 것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이다.
학교에서 나오고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글쓰기이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네가 교사였으니 글쓰기가 쉽겠지라고 하겠지만, 내 글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직도 문단을 구분하지 못하고, 때로는 맞춤법과 띄어쓰기에도 어려움을 느끼고, 문맥이 애매한 경우도 많다.
교사를 하던 사람이 학교에서 나와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러했다.
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첨삭했다. 첨삭해 준 학생들의 상당수가 나쁘지 않은 학교에 진학했으니 적어도 내 첨삭 실력이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학생들의 보고서도 첨삭했다.
지금의 고등학교 생활은 예전과 달라서 학생들이 서술한 보고서 형태의 결과물을 보고, 그것을 첨삭하고 그 과정에서 학생이 성장한 내용에 대한 관찰을 개인당 500 글자씩 평을 적어주는 것으로 생활기록부를 작성한다. 물론, 내 과거 생활 기록부는 “품행이 바르고 주변 친구들에게 배려를 잘 함.”정도가 전부였으나, 입시의 흐름이 바뀌면서 학생에 대한 최대한의 관찰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남기곤 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학생들에게 글을 어떻게 써야 한다고 잔소리하던 사람이 자신의 글을 공개된 장소(지만 나는 그 구석 어딘가에서 남 모르게 글을 흘리고 있다.)에 기록해서 남긴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위인 것이다.
“뭐야? 우리한테 그렇게 잔소리하더니 겨우 이거야?”
충분히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엄청난 용기를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쓰는 행위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고, 저조한 조회수는 누가 보겠냐는 안도감으로 작용되어 글 써 지르기라는 행위로 연결되었다.
이제는 그냥 내 이야기를 혼자 떠든다는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에서 새로운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일단, 나의 생각과 사고가 정리된다는 장점이 만들어지고 대화 속에서 나의 언어 표현에서 중언부언이 사라지는 기분이며, 하루하루 휘발되는 삶의 흔적이 조금씩 형체를 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곧 퇴직을 할 사람, 언젠가 퇴직을 염두하는 사람, 복직을 할까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들에게 글쓰기를 추천했다.
상당수가 교직에 있었던 사람들이니, 말하는 것에는 이미 익숙할 것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 된다는 의도로 한 이야기인데 모두들 기겁을 한다.
“에이, 선생님이니까 가능한 거지.”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렇다.
“나” 였으니까 가능했다고.
아니, 내가 그들보다 뛰어난 게 없는데 뭔 겸손인 건지.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반감이 앞섰다.
누구나가 교명을 들으면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서 교직을 이수한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날 놀리는 것 아닌가?
학창 시절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했다는 당신이, 조기 졸업을 했다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날 놀리는 것 아닌가?
상대는 바뀌면서 대화는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던 중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나”였으니까 가능했다는 것은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나의 차이를 언급한 것도 아니며 그들과 내가 단지 “다르기”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 먹을래?
난 짜장.
난 짬뽕.
이런 맥락이다.
난 글쓰기.
난 글쓰기는 싫어.
단순히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인정한다.
마라톤을 하면 좋다고 주말이면 강변에서 뛰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저는 걷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 하던 내 모습과 비슷한 것 아닐까?
그게 좋은 건 알겠지만, 마라톤 말고 다른 선택지를 찾는 내 모습처럼 말이다.
그와 나는 다를 수 있다.
때문에 내가 선호하는 것을 그는 선호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는 싫어할 수 있으며,
내가 탐내는 것을 그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단, 그와 나의 다름 사이에 수용하는 능력의 유무가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의 크기를 조율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와 내가 다르기에 그와의 아무런 교점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면 나는 나만의 작은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지만, 그와 내가 다르기에 그를 통해서 그의 세상을 조금이라고 넘보게 된다면 나의 영역은 적어도 그만큼은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영역까지 넘어가는 것은 그다음에 고민해도 되는 문제일 것이다.
어제 SNS를 보다가 김영하 작가님께서 친구에게 소비한 시간이 아까웠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편집한 콘텐츠를 봤다.
친구에게 하례하며 자신에게 소홀히 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언급하는 내용이었지만, 콘텐츠를 기획한 사람은 마치 친구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것의 필요를 언급한 것처럼 편집한 내용이었다.
물론, 그런 관점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넓은 세상보다는 좁아도 꽉 찬 삶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낸다.
넓지 않아도 어느 정도 밀도 있는 삶으로 안정화하고 그것을 조금씩 확장하고 싶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다.
가지 많은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말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는 바람 잘 날 없다고 하는데, 그런 가지 많은 나무가 되어서 신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다. 누구든 쉬어가고, 누구든 열매를 얻으며, 누구든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 그렇다고 절대적인 E형의 인간은 아니기에 여기서 “누구든”은 불특정다수를 향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나와 에너지가 통하는 사람.
대화가 되는 사람.
비슷한 가치를 가진 사람.
비슷한 성향의 사람.
함께 있어도 편한 사람.
넓은 세상에서 서로 다른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가능하다.
그와 나의 다름 속에서 발견된 작은 교점을 이용해서 내가 그의 세상을 보면 된다. 그리고 이해하고 수용하면 된다. 그렇다면 나의 삶 속에는 많은 사람들과의 교점이 만들어지고 적어도 나는 큰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 세상 속에는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와 나는 다르다.
억지고 그를 나의 관점으로 당기려 하지 말자.
그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과정에서 나의 세상을 넓혀가자.